동유럽6개국 여행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2023.08월28일 월요일~2023.09월10일 일요일(12박14일)
제3일차 오스트리아 편
2023.08.30.수요일 흐리고비온후 구름
아침 기상 05:00 –아침식사 06:32 코트야드 메리어트 린츠 호텔 출발 07:53 –버스 이동 2시간 – 짤츠함머굿 볼프강 샤프베르그산 등산열차 터미널 09:45 –등산열차 출발 10:12 –중간 정거장 10:35 ~10:38 –상부 정거장 10:47 – 정상은 짙은 구름으로 조망이 없음 –정상 카페 11:00 ~11:30(맥주 한잔씩) - 상부정거장 출발 12:05 –중간 정거장 12:14 ~12:18 –하부정거장 12:45 –도보 – 식당도착 12:53 –식당출발 13:35 –유람선 선착장 도착 13:45 –유람선 승선 13:55 –유람선 하선 14:27 –도보(근처에 볼프강 성인의 마을 있음) -유람선선착장 계단 올라 주차장 도착, 출발 14:35 ~14:39 – 차량이동 – 할슈타트 주차장 도착 15:23 – 후니쿨라 탑승장 15:40 –후니쿨라 상 15:45 – 곧이어서 케이블카 탑승 도보로 다리 건너 전망대 15:52 ~16:15 – 도보로 케이블타 타고 후니쿨라 상부 16:21 –후니쿨라 하부 정류장 16:25 –할슈타트 트레킹 –할슈타트 출발 17:32 –차량이동 – 짤츠부르크 아부테나우 모이슬 호텔 도착 18:15 – 저녁 식사 19시 ~19:50 –식사후 시내 산책 20:2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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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공화국 줄여서 오스트리아는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9개의연방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빈이다. 북서쪽으로는독일이 있고, 북쪽에는체코 공화국, 북동쪽에는슬로바키아, 동쪽에는헝가리가 있으며, 남쪽에는슬로베니아와이탈리아, 서쪽에는스위스와리히텐슈타인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면적은 83,879 km2이며, 인구는 약 9백만 명 정도이다. 공식 언어는독일어이나, 실제로 국민들은 여러 종류의방언들을 사용한다.
오스트리아는 976년 경변경백국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후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가들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점차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고,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국력을 꾸준하게 키워나갔다. 19세기 초에 이르자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졌으며,독일 연방의 주도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1867년에는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통하여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웠다.
오스트리아는사라예보 사건에서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한 직후,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시기에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전후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들어섰다. 처음에는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승전국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결국 1919년에 세워진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공식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계승국으로 인정받았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 출신의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를나치 독일에 합병하였다. 1945년에 나치가 패망한 이후에는 오스트리아도 잠시 동안연합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곧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세워져 주권국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된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총리가 행정부의 수반이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심지에는 빈,그랏츠,린츠,잘츠부르크,인스부르크등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1인당 GDP로 세계 20위 안에 늘 들 정도로 부유한 국가이며, 삶의 질도 굉장히 높은 수준이며인간개발지수도 세계에서 20위를 차지한 바 있다. 또한 수도인 빈 또한 그 수준이 높고 삶의 질이 높아 세계적인 척도가 될 정도이다.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은 1955년에 중립을 선포하였다. 1955년 이래UN의 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OECD와인터폴의 창립국이며, 1995년의솅겐 협정에도 조인하였고 1999년에는유로화를 도입하였다
한때 전 유럽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 제국이 쇠망하고 난 이후, 유럽에는 슬라브족,아바르족,훈족등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하였다. 이후프랑크족의 왕이었던샤를마뉴 대제가 788년 경에 혼란스러운 유럽 일대의 질서를 일부 다잡았고, 기독교를 전역에 포교하며 세를 넓혀갔다. 현재 오스트리아 지방은동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는데,오토 2세가바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에게 976년에 오스트리아 변경백의 지위를 내렸고, 이때부터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안동안 바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오스트리아’라는 지명은 996년에 작성된 바벤부르크 가문 관련 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1156년에는신성로마제국의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황제가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으로 승격하였고, 1192년에는 바벤부르크 가문이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동시에 획득하면서 그 세를 점점 넓혀갔다. 그러나 1246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부르크 가문의 대도 끊어졌고 오스트리아 공작위의 자리도 비고 말았다.
당시 오스트리아에게 대공위 시대가 찾아온 때는 마침 신성로마제국의대공위 시대와 시기가 겹쳤으며, 오스트리아 지역은 중부 유럽 전체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편 지배 가문이 사라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보헤미아의오타카르 2세였다.[9]그러나 그가 1278년에합스부르크 가문출신의루돌프 1세에게 격퇴당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부터1차 세계대전직전까지 몇 백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스위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서 떨어져 나가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자신들의 본토로 여기게 된다.
14세기와 15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하며 주변의 국가들은 점차 흡수해나가며 힘을 길러나갔다. 1438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독일 왕지위를 획득한 후, 1452년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독점하기 시작한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을 1453년에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시켰으며, 이후에는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아 기타선제후국들이나 제후국들과 격을 달리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수도였으며 인구도 몇 만명에 육박했던 빈도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군사적 정복이 아닌 결혼이나 혈연 관계를 통하여 영토를 넓혀갔는데, 1477년에막시밀리안 1세황제의 재위 시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에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유럽의 중심 가문으로 부상한 것이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였던 마리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마리는 프랑스의 압박으로부터 공국을 지키기 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였다. 이때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와 네덜란드를펠리페 1세가 물려받으면서 이 영토가 그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 한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펠리페 1세는 스페인 왕국의이사벨 1세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후아나 왕녀와 결혼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펠리페 1세의 아들인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고, 기존의 합스부르크 영지와 함께 스페인 왕위에 오르며카를 5세가 되어 유럽 중남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한편 막시밀리안 1세의 혈연을 통한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야기에우어 왕조의 왕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에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영토들도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상속되었다. 1521년에는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직을 물려받았으며, 1526년에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연달아 오르며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워졌다. 페르디난트 1세가 새롭게 가지고 온 동유럽 영토들은 오스트리아의 국력 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단숨에 중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떠올랐으며, 이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에 오스트리아가 패전하여 해체되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다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느슨한동군연합체제였으며, 타 국가들과 달리 내부적으로 결속되어있지는 못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달리 적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은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주었으며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인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분가하여 넘겨주었다.
1526년에 모하치 전투 이후,오스만 제국이 차지하지 않은 보헤미아와 헝가리 지방이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지속적으로 헝가리 쪽으로 동진하며 팽창 정책을 펴나가자 결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잦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이후 약 백여년 동안 기나긴 전쟁을 이어갔다. 1529년에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최대 명군이었던슐레이만 대제가1차 빈 포위를 개시하였으나, 이른 겨울과 눈서리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기도 했다.
1657년에서 1705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다스린레오폴드 1세의 시기 동안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683년에 폴란드의 왕인얀 3세의 지휘 하에 1683년에 성공적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막아낸 이후에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펼쳐 헝가리 영토의 대부분을 1699년의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가 지난 세월 동안 얻어낸 영토 상당수를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정당한 세습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카를 6세는 1713년에국사조칙을 발표하여 자신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뜻을 밝혔으며, 17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여성에게 황위를 이어받게 하겠다는 카를 6세에 대한 반대의 뜻이 강했으며, 이때 서로 황위를 주장하기 시작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졌다. 이때 때마침 힘을 키우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프로이센 왕국이슐레지엔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했고, 결국 이때 오스트리아는 2차례의 전쟁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상실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위를 차지한 뒤 프로이센에게 복수를 준비하자, 프로이센의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맞서기 위하여 당시루이 15세가 다스리고 있던 프랑스와엘리자베타 여제가 다스리고 있던 러시아와 연합을 맺어 포위 전선을 구축하였다. 전쟁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국 측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러시아에서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독일 출신의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자 러시아가 동맹에서 이탈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동맹국들까지 철수해버리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도 슐레지엔을 포기하며 프로이센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약 30여 년 동안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통하여 내정에 힘썼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전과 구분하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라고 부른다
1700년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공화정의 열풍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왕정제 철폐의 바람이 유럽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은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끈 프랑스 혁명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며 그 위상이 크게 깎여나갔다. 이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제국을 세우자, 당시 로마의 황제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권위가 무색해졌고, 결국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고 대신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제국은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영토를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했고, 1809년에 또 전쟁을 일으켰다가 다시 패배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다. 한편 인적 피해도 엄청나서, 1792년부터 1801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약 754,700여 명에 달하는 전쟁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가 휘청거리자, 유럽 내에서는 다시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빈 회의가 1815년에 열렸고, 오스트리아의 주도 하에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도 점차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아들이지만은 않았고, 오스트리아 본국과 독일 내부의 불화가 점차 계속 심해지자 1848년에 독일을 통일하고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한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혁명을 억누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1866년에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비스마르크재상이 이끌던 프로이센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을 잃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기며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전통적 우방이던바이에른 왕국마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으며 오스트리아의 독일 내 영향력은 날로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고 위상이 예전같지 않자, 동부의 헝가리 지방에서도 독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제국 정부는 헝가리 분리주의자들에게 이중 정부를 제안했고, 이 때 체결된 1867년의 대타협으로 인하여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설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프란츠 요제프황제를 유일한 황제로 모셨으나, 교회나 정부, 의회 등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서로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일종의 이중 제국이었다. 또한 다양한 슬라브계열 민족들, 크로아티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는 다민족 제국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막 떠오르고 있던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심각한 고질적 내분을 겪게 된다. 내부의 민족들이 자신들끼리 독립해 나가려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다. 제국은 비밀경찰을 확대하여 이들을 감시하기도 했으며, 8개 국어로 법령을 반포하고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각 민족들의 모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며 이러한 불화를 막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강렬했던 민족주의 세력은 범독일주의 세력이었다. 몇몇 극단주의 세력들은 오스트리아의 독일계를 자극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합병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일부 정치가들은 범독일주의 포퓰리즘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시도하는 등 정계도 대단히 혼란스러웠다.[15]다만 당시 독일 내부를 주도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류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스트리아의 범독일주의자들은 독일의빌헬름 1세가 가장 좋아한다는 꽃인 푸른색수레국화를 단추에 꽂고 다니거나 독일의 상징색이었던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을 즐겨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시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학교에서 이를 금지하고 범독일주의자들을 탄압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범독일주의자들과 타 민족들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고조되었다.[16]범독일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이후에 독일에 합류하기를 바랐으며, 이 때문에 독일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게다가 범독일주의자 계열의 정치인들이 독일계 국민들에게 이탈리아의 천주교회에서 나와 독일계 교회로 옮겨갈 것을 요구하며 사회 갈등이 종교에까지 미치니, 제국 내부의 상황은 갈수록 불안정해져만 갔다.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 황제와 장교들 간의 싸움으로 점차 망조가 들어가고 그 국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때를 틈타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1908년에 합병한다. 그러나 이 합병은 인근의 세르비아 왕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1914년에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 사라예보에서페르디난드 대공을 암살하는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전쟁이 터졌다.[17]이 전쟁은 서로 간의 동맹국들 간의 참전을 통하여 결국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왔으며,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1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1918년 10월 21일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의원들이 빈에서 회담을 열었고, 임시 정부를 먼저 세우고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0월 30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며, 황제도 이를 인정하여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대표를 이탈리아와의 협정 체결에 대표로 보내기도 하였다.[18]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황제는 1918년 11월에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11월 12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선포하고 왕정을 폐지하였다.
1919년에는생제르맹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는 갈기갈기 찢어져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조약으로 인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일부 지방들만 수중에 겨우 남겼으며, 한때 중부 유럽을 대부분 재패하였던 영토의 크기는 크게 축소되었다. 11월 12일에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헌법을 만들고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민주공화국이다’와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이다’를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민들 모두가 서로 영토를 합쳐 동일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독일의 힘이 커질까 두려워한 프랑스와 영국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고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을 통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을 막아버렸다. 또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아예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바꾸게 강제했다.
생 제르맹 조약으로 인하여 3백만 명이 넘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이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헝가리, 이탈리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떨어져나간 지역들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티롤 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보헤미아 등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티롤 주는 1980년대에 이탈리아가 전격 자치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주된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직후,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당시 통화였던 크론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1922년 가을에는국제연맹에서 융자를 받아 파산을 겨우 틀어막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경제 주권이 한시적으로 국제연맹으로 옮겨갔다. 1925년에는 마침내 오스트리아 정부가 크론화 대신 실링화를 새로이 도입하였으며, 10,000:1의 비율로 크론화와 교환하도록 하였다. 이후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짧은 경제적 호황기를 누렸으나, 1929년에 미국에서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고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이 호황기도 얼마 지나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1933년에 극우 정당 출신의 엥겔베르트 돌푸스수상이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를 해산하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우면서 그 막을 내린다. 돌푸스 수상 직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정계에는 사회민주당과 보수당 측이 서로 양분하고 있었는데, 사회민주당은공화수호동맹이라는 이름의 준군사조직을 운용하며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사회민주당과 보수당 측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돌푸스 수상을 국가수반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돌푸스 수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재의 야심을 드러내고 의회를 해산하였고, 점차 극우적 면모를 드러내며 야당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1934년 2월에는 공화수호동맹의 인사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잡혀들어갔으며, 사회민주당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관련 인사들은 구속되거나 해외로 쫒겨났다. 이때 돌푸스 수상과 극우세력은 자신들의 위협으로 여긴나치당또한 동시에 탄압했다. 그러던 중 1934년 5월 1일에 오스트리아 파시스트들과 돌푸스 수상은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돌푸스 수상은 7월 25일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돌푸스 수상의 뒤를 이은쿠르트 슈슈니크는 이전 정권보다 훨씬 독일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오스트리아를 ‘독일계 국가’로 선포하되 다만 독일로부터 독립은 유지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1938년 5월에 국민투표를 열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합병을 투표에 부치기로 합의하였으나,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계를 장악하고 독일군이 국내로 침공하여 국민투표 실시 자체를 차단해버리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1938년 3월 13일에는 독일이안슐루스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고야 만다. 2일 후 오스트리아 출신의아돌프 히틀러총통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품에 돌아왔다’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오스트리아를 완전한 독일령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합병된 이후, 1938년 4월 10일에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열린 최후의 선거였는데, 여러 후보가 나와 경쟁하는 정상적인 선거가 아니라 나치당 후보들의 명단들을 제시해놓고 이들의 의원직 취득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이 동의 여부를 묻는 단순한 예, 아니오식 선거였다. 다만 유대인들과 집시들은 투표에 허가받지 못했다. 선거의 참여율은 99.5%로, 이들 중 98.9%가 나치당 의원들에게 동의한다는 평을 남겼다. 한편 히틀러의 본고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경우, 전체 투표자들의 99.7%에 달하는 사람들이 나치당에 찬성표를 던졌다.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당과 독일 합병에 대하여 찬성을 표했으나, 특히 빈과 같은 대도시처럼 유대인들이 많았던 지역에서는 독일을 딱히 환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 숙원과도 같았던 독일과의 합병을 이루어낸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지지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었으며, 안슐루스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1938년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흡수된 직후부터 부유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이 재산을 강탈당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적으로 유대계 자본들을 강제로 뜯어오는 것이 허가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출신의아돌프 아이히만이 직접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탄압을 감독했다. 빈의 시나고그에 살고 있는 유대인 가옥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했으며, 오스트리아 남부에 있는 린츠,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등의 유대인들도 구속되거나 폭력의 대상자가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당시 벨기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에 대하여 반대의 뜻을 밝히고 독일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오스트리아 왕실을 대표해서 독일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자, 독일 나치당은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지명수배하고 체포 즉시 사살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나치는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오츠마르크’로 개명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 전체 인구의 8% 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저명 인사들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아돌프 히틀러,에른스트 칼텐부르너,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등이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인 것이다. 또한 나치 친위대의 13%가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24]나치당 절멸수용소에서 일하던 직원들의 무려 40%가 오스트리아인들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당시 연합국 측의 공습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지방을 군수 공장의 집합소로 만들었으며 특히 유대계나 집시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어놓고 군용기나 탱크, 미사일 등을 제조하는 등에 활용하였다.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에 동조하는 자들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나치당에 반대하며 레지스탕스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저항 세력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게슈타포들에 의해 분쇄당했으며, 빈의 게슈타포 본부를 테러하는 내용의 계획도 게슈타포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저항군 측에서는 연합국 측에 군수 공장의 정보들을 넘겼다.[25]이 저항군은 미국의OSS와도 연이 닿아있었고, 아우슈비츠 등의 대규모 학살 등에 대한 정보들을 이들에게 폭로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 목표는 나치 독일이 최대한 일찍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독립 오스트리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패색이 명확해지고 점차 독일군은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모두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1945년 4월 13일에 나치 독일이 무너지기 직전에 빈이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한편 연합국 측에서는 ‘알프스 요새 작전’을 펼치며 동부 알프스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계획하였으나, 독일이 지나치게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이 무너지고 난 이후,카를 레너와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당수였던아돌프 셰르프, 오스트리아 인민당의 당수였던 레오폴드 쿤스차크 등이 1945년 4월 27일에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레너 수상을 중심으로 소련과스탈린의 후원을 받아 빈에서 임시 정부를 세웠다. 4월 말에 이르자, 오스트리아의 남서부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나치 치하에 있었다. 1945년 5월 1일에는 1934년 5월 1일에 돌푸스 수상에 의해 폐지된 이전 연방 헌법이 다시 되살려졌으며 다시 기존의 민주 오스트리아로 회복하는 작업이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총 사망자 수는 약 26만 명에 이르며, 유대인의홀로코스트피해는 약 65,000여 명에 이른다. 1938년에서 1939년까지 무려 14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비슷하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되어연합국 점령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국력의 차이가 있으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을 선포한 점 등을 고려하여, 연합국은 점차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화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보수당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되어 소련과 스탈린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권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나, 카를 레너 수상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아예 국가를 반으로 갈라 새로운 서구식 정부를 세우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연합국 측에서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침공당해서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5월 15일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획득해 내었고, 그해 연합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난 10월 26일에 오스트리아 의회에서는 ‘영구 중립국’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 날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국가기념일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워진 공화국과 구분하여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1920년과 1929년의 헌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1945년에 다시 한 번 개헌을 했다. 이 시기 이후로 오스트리아 정치는 2개의 정당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고 있는데, 하나가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고 나머지 하나가 오스트리아 국민당이다. 1945년 이래 단일 정권이 등장한 적은 1966-1970년의 국민당 정부, 1970-1983년의 사회민주당 정권, 이 2번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기의 경우에는 주로 대연정을 맺거나 다른 군소정당들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94년의 국민투표를 거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 1995년 1월 1일에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양대 정당인오스트리아 국민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의 군비 증강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현행 체계 유지를 원하는 반면, 중도우파 정당인 군비 증강을 통해 유럽의 군사 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원한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을 통하여 평화유지 임무를 하고 있으며, NATO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 리히텐슈타인이 셍겐 조약에 가입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린츠
오스트리아북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주도이며 인구 20만의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동유럽 체코국경에서 30km 남쪽에 있으며,도나우강을 끼고 있다
린츠는 서기 799년 린츠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 도시는 과거 로마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방 정부가 있던 도시로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체코와 폴란드, 이탈리아 등을 잇는 중요한 무역의 길목으로써 역할을 해 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가 말년을 보냄으로 짧은시간이지만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에 가장 중요한 도시이기도 했다. 1493년 왕이 죽은 뒤 도시는 명성을 잃게 되었다린츠를 거쳐간 사람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행성운동법칙을 만든 수학자요하네스 케플러가 있다. 작곡가안톤 브루크너역시 린츠에 살며 지역 작곡가로,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18년간 린츠에 머물렀다.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 브루크너 하우스가 있다
이외아돌프 히틀러가 린츠 근처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났으며 유년기에 린츠로 넘어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린츠의 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말년의 히틀러는 린츠가 그의 진정한 고향이라 여겼다고 전해진다. 린츠를 나치의 제3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대규모의 건축 계획을 구상했고 제2차 세계 대전당시에는 도시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거대 산업화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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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상 05:00
오늘도 아침 5시에 일어난다. 눈은 더 일찍 떳지만 카톡하고 보내다가 5시에 일어나 세면하고 짐도 챙기고 한후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오니 벌써 다들내려와 그릇에 한가득 담고 있다. 시내에 위치한 호텔이라 주변으로 산책할곳도 마땅치 않고 하여 답답하였다. 식사는 호텔 뷔페식으로 먹거리는 풍부하게 있다. 빵종류가 다양하며 내가 주로 가져다 먹는 베이컨도 있고, 햄종류도 많다. 치즈도 있으나 상당히 짠편이다. 소세지도 있고, 유럽에서 빠지지 않는 신이내린 선물이라는 올리브도 있다. 올리브유는 다른 식물성 기름에 비해 산화가 덜 일어나고 몸에 좋은 항산화성분과 항염증물질이 들어있는 것이 특징으로 연한 연둣빛의 노란색 빛깔을 띠고 있고 씁쓸하면서 알싸한 매운맛이 나는 것이 특색이다. 좋은 콜레스테롤과 노폐물을 배출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어 공복 시에 밥숟가락으로 한 두 스푼씩 드시면 혈관예방에 좋은 식품이라고 한다. 계란말이도 하나 담아다가 먹고 난후 오랜지 쥬스 커피도 한잔마시고 식사를 끝낸다.
짤츠함머굿 볼프강 샤프베르그산 등산열차 터미널 09:45
아침식사후 린츠 메리어트호텔을 출발하여 짤츠함머굿 볼프강변에 있는 샤프베르그산 등산열차를 타러 간다. 린츠는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와 제일첫번째에 있는 도시로 이제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 인근의 짤츠 함머굿 볼프강으로 향한다. 버스로 2시간 거리다. 시내를 벗어나자 깨끗하게 정돈된 들판을 지난다. 역시 목초지가 주류를 이루는 푸른 초원지대를 따라 달리니 시원하기도 하고 상쾌한 기분이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끼여 있고 간혹 보슬비가 내린다. 오늘 샤프베르그산에서의 조망을 볼수 있어야 하는 대 걱정이다. 2015년도에 갔을 때는 볼프강호 끝에 있는 장크길겐마을에서 곤돌라를 타고 츠뵐퍼호른산에 올랐었다. 해발 약1500m쯤 되는 산이다. 오늘 오를 산은 해발 약1732m로 좀더 높은 산이다. 주변으로 호수가 많은 곳이다. 이지역에 호수가 62개가 있다고 가이드가 애기 한 것 같다. 짤츠는 소금이라는 뜻이고, 함머굿은 창고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금창고라는 것이다. 이제 버스는 커다란 호숫가 옆으로 진입을 하여 진행한다. 기억이 새록새록나는 지역이다. 예전보다 터널이 많이 생긴 것 같다. 좌측으로 할슈타트로 가는 길도 지나고 좌, 우측으로 갈리는 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그때는 좌측으로 갔는대 여기서 길이 틀리다. 지금 지나온 호수는 트라운호로 볼프강호수보다 좀 더 큰호수다. 우측길을 따라 들어가니 길이 더 구불거리며 마을로 진입을 한다. 마을을 지나며 샤프베르그산 산악열차 탑승장이 나온다. 린츠 호텔에서 대략 2시간이 걸렸다.
정상 카페 11:00 ~11:30(맥주 한잔씩) - 상부정거장 출발 12:05
등산열차 탑승장에 도착하니 비는 오지 않치만 구름이 역시 많이 끼였다. 잠시 시간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볼프강호수가로 나가 사진도 찍고 탑승장으로 들어와 서서히 진입하는 작은 미니 증기기관차에 탑승한다. 샤프베르그산으로 오르는 산악열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의 하나로 1893년부터 130년 동안 운행되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가파르게 오르는 산악열차로 톱니바퀴로 올라서 뒤로 밀리는 것을 방지 한다. 운행시간은 대략 35분이다. 10시 12분 출발한 산악열차는 마을을 지나 산으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주변으로 우거진 숲도 볼만하다. 어느정도 오르니 볼프강호수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점점 고도를 높이며 구름에 가려 볼 것은 없지만 기분은 아주 좋다. 도중에서 서로 마주하는 열차(교행)를 지나치고 다시 더 오르면 중간 정거장에 닿는다. 구름으로 인하여 철도옆 건물만 보일 정도다. 해발 약1350m쯤 되는 곳이다. 여기서 내려서서 정상까지 올라가면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2시간 이내면 올라갈수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열차는 더욱 가파르게 기적을 울리며 올라간다. 양쪽 바위벽사이를 통해서 오르고 등산로 지점에서는 기적을 울려서 열차가 오는 것을 알린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 터널을 빠져나가면 샤프베르그산 상부역에 닿는다. 해발 1700m쯤 되는 곳이다. 이제 이곳에서 구름이 자욱하게 낀 샤프베르그산 정상을 향하여 오른다. 지그재그로 올라선다. 어느 길로 가건 관계는 없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며 정상에 있는 카페로 가는 길이다. 정상 가페 좌측으로 해서 목책이 쳐져 있는 전망대로 올라서니 구름에 가려 보이는 것은 전망대 바로 아래로 절벽정도만 보인다. 참으로 안타깝다 다시 오긴 어려운 곳인대 우리가 올라온 방향으로 볼프강호수가 보이고, 그 뒤편으로 츠뵐퍼호른산과 그 뒤편으로 펼쳐지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산들이 보일건대 구름바다이니 너무 마음이 안좋다. 뒤편으로 펼쳐지는 짤츠함머굿에서 가장큰 호수인 아터호와 그 옆에 있는 몬드호의 모습도 볼수 없으니 우짜노~~
아터호는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에 위치한 호수로 최대 길이는 18.9km, 최대 너비는 3.3km, 수면적은 46.2km2, 유역 면적은 3.943km2, 평균 수심은 85m, 최대 수심은 169m, 수면 높이는 469m이다.
짤츠함머굿지대에 위치하며 보덴호, 노이지들러호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3번째로 큰 호수라고 한다. 일정한 규모의 바람이 불고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기 때문에 요트와 수영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오늘 조망은 틀렸고 이제 힘멜스포르테(Himmelspforte)카페로 내려가니 벌써 우리님들 자리를 차지하고 담소 중이다. 각자 맥주한잔씩 시키서 맛있게 마시고 다시 나와서 전망대로 올라서니 구름이 조금씩 벗어지며 우측으로 바위봉두 보여주고 아터호 방향으로 구름사이로 마을이 보이기도 하여 잠시나마 조금은 아쉬움을 달랬다. 전망대에서 조금 튀나온 절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몇장씩 남기고 이제 산악열차 상부역으로 향한다.
샤프베르그 산악열차 탑승장 하부정거장 12:45
전망대에서 내려와 산악열차 상부정류장에 도착하니 열차가 이미 도착해 있다.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하는 사이 서서히 구름이 걷히며 앞쪽으로 조망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다. 아쉽지만 다음 일정이 있으니 열차를 타고 이제 내려서기 시작한다. 급경사 지역을 내려서며 조망이 트이니 아 멋진 전경이 펼쳐진다. 중간 정거장에 도착을 하니 우측으로 길죽하게 튀어나간 능선으로 소들이 노는 모습도 보이고 산아래로 볼프강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열차를 기다리던 분들이 열차가 좌측 선로로 들어가니 구름다리를 건너서 우리 열차에 탄다. 열차가 교행을 하고 나서 열차가 뒤로 퇴행후 다시 전진을 하여 반대편 선로를 따라 진행한다. 이렇게 하여 서서히 내려서며 하늘이 드러나고 날씨가 점점 좋아진다. 조금만 일찍 날씨가 좋아 졋으면 샤프베르그산의 멋진 조망을 볼수 있었을것인대 아깝다. 이렇게 하여 하부 정류장에 도착을 하니 12시 45분이다. 등산열차의 운행거리는 편도 대략 5.84km가 나왔으며 시속 평균 9.9k/h가 나왔으니 그리 빠른편은 아니다.
산악열차 : 1인 왕복(47.6 유로)
유람선 승선 13:55 –유람선 하선 14:27
이제 걸어서 식당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오던 길을 따라 진행하면 10분을 못가서 좌측으로 멋지게 지은 식당이 나온다. Dorf-alm ZU St Woifgangseer식당으로 제라늄으로 장식한 멋진 목조형태의 건물로 식당은 우측으로 들어가서 길죽하게 지은 식당이다. 가이드는 전에 한번 왔었다며 평가를 나쁘게 한다. 인심이 나쁘다나 뭐 그런~~
어쨌든 식당에 들어가니 화장실 표시가 예쁘다. 알프의 멋진 신사분이 그려져 있고, 한쪽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그려져 있으니 각자 판단에 의해서 화장실 들어가면 된다.
식사는 따끈하고 구수한 국수가닥 같은 것은 든 스프가 먼저 나오고 주 메뉴로 감자 3알이 든 육수가 언혀진 돼지고기인지 소고기인지 맛을 모르겠네 ~~
달달한 후식 먹고 나와서 이제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대 골목을 들어서며 눈돌릴 틈이 없다. 빠르게 진행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가는대 사람도 많고 기념품파는 곳도 많은 이곳에서는 시장통인 것 같다. 역시 유럽은 아직도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멋지기도하고 그 풍습이 남아 있어 마차도 다닌다. 관광용이긴 하지만 잘생긴 말이 끄는 멋지게 꾸며진 마차도 타고 싶다. ~
이렇게 하여 열심히 골목을 빠져나가니 볼프강호수가에 닿는다. 커다란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고 잠시 더 가면 작은 유람선을 타는 곳에 닿는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작은 유람선을 잠시 기다려 우리들만이 탄 유람선은 볼프강 호수로 유유히 빠져들어간다.
장크트 볼프강
장크트볼프강은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그문덴 구역에 있는 작은 휴양도시이다. 샤프베르크산 기슭에 있는 볼프강 호수 연안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유럽의 순례지로 유명했고 지금은 고급 휴양지로 유명하다. 관광 명소로는 교구교회인 장크트볼프강 성당, 유서 깊은 호텔 바이세스 뢰슬, 산악열차 및 크리스마스 마켓 등이 있다. 도시 이름은 레겐스부르크의 성(聖) 볼프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장크트볼프강은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 그문덴주에 있는 작은 휴양도시로 잘츠카머구트지역 안에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샤프베르크산의 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볼프강 호수 연안에 위치한다. 잘츠부르크주에 있는 도시 스트로블 및 장크트길겐과 가까이 있다.
장크트볼프강으로 가는 교통은 잘츠부르크시에서 바트이슐까지 연결되는 볼프강제 스트라세 연방 고속도로 B158을 이용하면 된다.
성 볼프강은 976년 근처의 몬드제 수도원으로 철수한 후 볼프강 호수 연안에 첫 번째 교회를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산 아래로 도끼를 던져서 도끼가 떨어진 곳에 제단을 쌓고 교회를 지었는데 바로 장크트볼프강 성당이다. 1052년 성 볼프강은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1183년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이 교회의 순례를 언급하면서 가톨릭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다.
1481년 유명한 조각가 미하엘 파허가 제단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서브 캠프가 여기에 있었다.
장크트볼프강 성당의 공식 명칭은 교구교회다. 1000년이 넘은 낡은 성당이지만 안에는 높이 12m에 달하는 황금으로 장식된 제단이 있고 밖으로 나오면 언덕 위의 테라스에서 푸른 볼프강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호텔 바이세스 뢰슬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1878년에 지어져 1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12년에 파울 요한 페터가 호텔을 인수했고, 현재는 후손인 헬무트 페터가 3대째 경영하고 있다. 랄프 베나츠키가 작곡한 오페레타 '백마장에서'의 배경이 된 이후 더 유명해졌다.
샤프베르크반은 샤프베르크 산을 가로 지르는 산악열차로 장크트볼프강의 명물이다. 장크트볼프강의 철도와 교회는 1987년 미국-오스트리아 텔레비전 영화 '플리카와 함께한 크리스마스'의 촬영 장소다. 또 장크트볼프강은 인기 있는 겨울 스키 리조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장크트볼프강[St.Wolfgang] (유럽지명사전 : 오스트리아)
볼프강호수는 웅장한 알프스산맥과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만든 투명한 호수가 어우러진 곳으로 아름다운 전경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유람선 투어는 아기자기한 매력을 가진 호숫가 마을 탐방으로도 이어진다. 볼프강 호수 끝에 자리잡은 장크트 볼프강(St. Wolfgang),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이자 누이 난네를이 결혼 후 살았던 장크트 길겐(St. Gilgen) 마을은 이번여행에는 빠져 있지만 2015년도에는 다녀온 곳이다. 그냥 평범한 집이다. 잘크트 길겐마을에서 곤돌라를 타고 츠뵐프 호른산에 오르는 것도 좋은대 한꺼번에 다할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해발 1490m가 적혀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보는 샤프베르크산은 아직도 정상부가 구름에 휩싸여 있다. 올라가는 산악열차 선로가 보이기도 하고 골짜기로 길게 파인 곳은 이번 비로 인하여 물줄기가 형성되어 폭포수를 이룬다. 이번비가 상당히 많이 왔다. 이곳으로 오면서 보이던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것도 보았고 지나는 산들의 골짜기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줄기도 보았다. 초원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들, 말들도 보았다. 짤츠함머굿의 볼프강지역은 멋진 모습이다.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는 볼프강호수변의 아름다운 마을도 보았다. 저기 어디인가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도 있을 것이고 1000년이 넘었다는 성당도 있을게다, 우리가 유람선을 타던 선착장앞에 한글로 쓰인 “볼프강 성인의 마을”이 100m라고 되어 있었던 것같다. 그때 지나던 사제가 그곳에 계시는 분이 아닌가 싶다. 유람선은 대략 30분을 타고 즐긴다. 부족함은 없는듯하다. 모두가 만족해 하는 모습에서 기분이 좋다.
할슈타트 주차장 도착 15:23
유람선에서 내려서서 좁다란 골목을 따라 올라선다. 올라서며 보는 볼프강 지역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계단을 올라서면 널찍한 주차장에 닿는다. 이제 우리는 오스트리아 관광에서 빠지지 않는 가장 아름답다고하는 할슈타트로 향한다. 오던길을 따라 진행하여 큰길로 나간후 우측길을 따라 들어가면 좁다란 길로 한바퀴 돌아내려서서 진행을 한다. 길이 묘하게 생겼다. 이후 할슈타트로 들어가는 길에는 양쪽으로 높다란 산들이 위치하여 좁다란 협곡을 따라 진행하여 맑은물이 흐르는 강변을 따라 진행한다. 이물줄기는 흘러서 린츠에서 볼프강으로 가면서 지났던 트라운호를 지난후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을 거치고 헝거리의 부다페스트지역을 지난후 크로아티아를 거친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국경을 이루며 흘러흘러서 지금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에서 흑해도 들어가는 물줄기다.
다뉴브강
다뉴브강(라틴어:Danubius다누비우스, 영어:Danube다뉴브) 또는도나우강(독일어:Donau)은독일남부에서 발원하여 루마니아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860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다뉴브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강과 브리가흐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헝가리의 수도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사이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철문(鐵門, Iron Gates)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평원을 지나게 된다. 흑해에 가까워지면서 다뉴브강은 도브루자 구릉지대를 만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흑해로 유입한다. 강 하구에서는 세 개의 주요 분류로 나뉘면서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그 면적은 약 5,000km2이다.
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독일, 오스트리아: 도나우강 (Donau)
슬로바키아: 두나이강 (Dunaj)
헝가리: 두너강 (Duna)
크로아티아: 두나브강 (Dunav)
세르비아: 두나브강 (Дунав / Dunav)
불가리아: 두나프강 (Дунав)
루마니아와 몰두바: 두너레강 (Dunăre)
우크라이나: 두나이강 (Дунаи)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 운하가 1992년 건설된 이후 다뉴브강은 북해의 로테르담으로부터흑해의 술리나까지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3500km 수로의 일부가 되었다. 다뉴브강으로 운송된 화물량은 1987년에 1950년 수준의 13.3배인 9천 180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시기에 있었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공급 과정에서 세르비아 교량 3곳이 파괴되어 다뉴브강 운행이 한동안 힘들어졌다가 2002년 그 잔해가 모두 치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슈트라우스 2세의 유명한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가 있다.
강줄기를 따라 들어가면 우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다리를 건넌후 잠시후 할슈타트호수변길을 따라 진행하여 잠시 더 가면 터널이 나오고 터널 중간지점에서 폭포수도 구경을 하고 터널을 빠져나가면 잠시후 할슈타트 주차장에 도착을 하게 된다. 여기 주차장은 미리예약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 예약이 안되었다고 잠시 지체가 된다. 이후 주차장에 도착하여 하차한후 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할슈타트 전망대로 올라가는 후니쿨라 탑승장이다.
할슈타트전망대 및 할슈타트마을 트레킹 15:40 ~17:30
할슈타트
오르트리아 오버외스터라히주의 마을이다. 할슈타트호에 가까이 있으며 알프스 기슭의 호수 지역 잘츠캄머지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 경승지이다. 유네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마을의 꼭대기에 위치한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철기시대 유물들로 유럽의 초기 철기문화를 일컫는 "할슈타트 문화"가 이에서 유래되었다.
동화 속의 호수마을과 같은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의 9개의 주 중에서 오버외스트라이히 주에 속하는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할슈타트 호의 남서쪽, 다흐슈타인 산맥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할슈타트는 자연 경관 뿐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유명하다. BC 2000년부터 형성되었던 전 세계 최초의 소금광산으로 유명하며,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BC 1000년부터 BC 500년의 철기 문화가 나타났고, 할슈타트의 분묘 유적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철기문화는 유럽 초기의 철기문화인 ‘할슈타트 문화’를 이루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이 지역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서, 할슈타트는 1997년도부터 ‘할슈타트-다흐슈타인 잘츠카머구트 문화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의 소금산업이 에벤호 지역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관광산업이 주된 할슈타트의 산업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호수와 산을 깎아서 집을 지어서 만들어진 마을로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전에 왔을 때는 여기 할슈타트 전망대는 올라가지 않았었다. 마을뒤편으로 임도를 따라 거의 중간 지점 이상까지 올라가다가 너무 멀다고 하여 다시 내려왔던 곳이다. 오늘은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간다. 이곳은 사람들이 워낙많기 때문에 소매치기 조심하는 애가가 떳다. 인구 약1000여면의 작은 마을에 하루관광객이 3000명 이상이 몰려 든다고 하니 마을사람들도 매우 불편해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을 자체가 관광수입에 의존하는 마을로 그 불편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곳도 소금광산이 있는 곳으로 할슈타트는 과거에 이로인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세계 최초의 소금광산 또한 할슈타트의 상부에 위치해 있어 투어가 가능하다. 할슈타트 문화의 도래지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부분에 등록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 할슈타트는 배를 타고서만 접근이 가능했고 1890년 서쪽 강가의 바위를 부분적으로 폭파함으로써 최초로 길이 생기게 되었다.
2011년 6월 중국이 할슈타트를 복제한다는 첫 언론 보도가 나간 뒤 2012년 6월 중국의 한 광산회사가 광동성의 혜주시에 할슈타트 실제 크기 규모의 마을을 복제했다. 그후 중국인들이 실제 모습을 보겠다고 몰려들어 27배의 관광객들이 몰려들며 흑자로 전환했다고 한다.
후니쿨라 탑승장에 도착해서 잠시 화장실 다녀오고 후니쿨라 타고 거의 수직으로 올라서 상부 탑승장에서 하차후 옆으로 돌아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할슈타를 내려다볼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길다란 줄 끝에서 서서 순서를 기다린후 사진 한 장 찍는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앞쪽 멀리 내일 다녀올 얼음동굴이 있는 지역이다. 전망대에서 다시 다리를 경유해 엘리베이터에 도착한후 엘리베이터로 내려가기도 하고 계단으로 내려가기도하면 잠시후 똑같이 만난다. 이후 후니쿨라를 타고 내려오는 대 대략 45분가량이 걸렸다. 이제 할슈타트 마을을 구경한다. 전에 한번 돌아 봤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흥미가 덜하지만 그래도 예뿐 것은 어찌 할수 없다. 반대편으로 이쪽으로 건너오는 배들도 보이고 마을을 지나며 보는 각가지 모습이 예쁘다. 목조건물앞에 놓여진 꽃들, 기념품상점에 전시된 물건들 모두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렇게 하여 끝지점 사진에 나온다는 전망포인트에 도착하여 사진들 한 장씩 찍고 돌아오는 길에는 위쪽으로 올라서 교회도 들르고 폭포앞까지 올라간후 내려서서 되돌아 오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여 할슈타트 관광을 마치니 시간이 전망대 포함해서 2시간 10분이 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알차게 돌아본 할슈타트의 아름다운 풍경이 었다.
식사후 시내 산책 20:20 ~20:40
할슈타트관광을 마치고 이제 숙소로 이동을 한다. 오던길을 따라 진행하여 터널을 지나고 할슈타트호수변길을 따라 진행하여 오면서 건넜던 교량에서 우측으로 빠지다가 다시 되로 빠져서 다시 좌측으로 진행을 하면 산골짜기 협골으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진행한다. 이번비로 인하여 산사태가 여러군데 났고 쓰러진나무 다수 보인다. 비피해를 복구하느라 몇군데를 도로 한선으로 운행하느라 지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진행을 하면 좌측으로 작은 연못이 보이는 마을로 진입을 하여 마을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을 한다. 좌측으로 멀리 높다란 산들이 보이는 지역이다. 좌측으로 높이 보이는 산들은 즉 할슈타트 뒤에 있는 Hohor Dachstoin(다흐슈타인)산으로 높이는 해발 2996m로 되어 있다. 여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잠시후 고개를 넘어서 서서히 내려서게 된다. 내려서며 보는 을의 풍경이 멋지다. 잠시 내려서면 아담한 마을이 나온다. 아부테나우라고 하는 마을로 좌측으로 높다란 산도 있어 산에 오르기도 좋겠다. 산의 이름(Wengerscharte 2077m)은 잘 나오지 않치만 대략 2000m는 되겠다. 마을에는 여러개의 아담한 호텔도 있으며 슈퍼마켓도 보이고 좁다란 골목으로 형성된 시내의 중심시역으로 카페들도 형성되어있다. 버스는 슈퍼마켓옆으로 빙돌아서 들어간다. 뒷골목이나 앞길이나 길폭은 폭아서 대형버스가 진입하기에는 어렵겠다. 이렇게 하여 뒤편에 있는 아부테나우 모이슬(Moisl)이란 아담한 호텔에 닿는다. 정면으로 제라늄꽃이 장식된 작은 호텔이지만 주변의 경치는 매우 좋은 산간마을의 호텔이다. 이곳의 자료는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찾는 이들이 별로 없는 곳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약 60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할슈타트보다는 짤부르크에 가깝겠다.
호텔앞에 놓여진 작은 사과 하나씩 가지고 먹기도 하고 잠시 기다려 특이하게 생긴 구식 열쇠(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열쇠)를 들고 좁다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내려와 식사를 한다. 침대는 크기는 하지만 방은 좁은 편이고 샤워기 욕조가 있는 방은 그런대로 괜찮다.
잠시후 식사를 하러 내려가니 식당은 좌측으로 있으며 널찍하니 좋다. 야채가 나오고 주메뉴로 야채죽에 감자 으깬 것 가운데 소고기 스테이크가 있다. 여기서 와인 처음엔 2병 시켯으나 모자라 1병더 시켜마시고 나중에 신여사님이 한병더 하자고 해서 뒤에 남은 몇사람들이 마시고는 이제 마지막으로 시내구경을 나간다. 마을이 아담고 이쁘게 생겨서 그냥 잠을 청하기 아깝다. 호텔 우측으로 돌아가니 요란 음악소리가 나온다. 마을분들로 구성된 밴드다. 앞쪽 호텔앞과 작은 카페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음악도 듣고 맥주도 마신다. 잠시 구경을 하다가. 좀 더 진행하여 올 때 보던 멋지게 제리늄으로 장식한 호텔앞까지 가서 구경을 하고는 다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이날 마지막으로 남아서 술마신님들 아침에 산책도 못나왔지요 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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