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암자 순례길
2024.12.24.화요일 맑음
참석인원 : 마나님이랑 둘이서
청주 집 06:45 – 강서 하이패스 – 여산휴게소(연료 4만원 보충) 07:44 ~08:03 – 구례 화엄사 톨게이트(통행료 9500원) 09:04 – 화엄사 주차장(해발 약215m) 09:20 ~09:33 – 지장암(0.260km, 약245m) 09:39 – 보도블럭 임도길 – 좌측 데크계단(1.16km, 약270m) 09:53 – 금정암 입구(1.38km, 약285m) 09:57 – 금정암(1.63km, 약315m) 10:05 – 다시 금정암 입구(1.81km, 약285m) 10:12 – 비포장 임도길 – 내원암(길 우측편으로 작은 암자, 2.34km, 약320m) 10:21 – 좌측으로 연기암 가까이 가는 길 10:25 – 미타암 입구(이정표, 2.63km, 약330m) 10:26 –좌측으로 미타암 길 –미타암(한옥형태의 규모는 보통임, 2.88km, 약360m) 10:32 – 지리(전남) 28-4번표지목(3.33km, 약350m) 10:38 – 보적암 입구(50m전부터 세멘트길, 3.68km, 약360m) 10:43 – 우측으로 오르막 세멘트길 – 보적암(신축중인 암자, 형제봉 등산로 입구, 4.04km, 약415m) 10:51 – 되돌아서 보적암 입구(4.40km, 약360m) 10:57 ~11:03 – 보도블럭길 – 청계암 입구(5.41km, 410m) 11:19 – 우측으로 오르막 세멘트길 –청계암(아담한 찻집같은 암자 2채, 5.58km, 약440m) 11:22 – 다시 되돌아 청계암 입구(5.73km, 약410m) 11:25 – 세멘트길 –지리(전남) 28-7번표지목(5.88km, 약425m) 11:27 – 다리(6.03km, 약430m) 11:30 –등산로(6.14km, 약440m) 11:31- 연기암 관음전, 6.54km, 약480m) 11:42 ~11:57 –등산로(7.05km, 약440m) 12:01 – 내리막 돌계단 – 서어나무쉼터 이정표(화엄사 1.9km, 약430m) 12:07 –내리막 돌길(가는 대나무숲길) -어은교,어진교(7.36km, 약390m) 12:13 – 용소 이정표(좌측으로 둘레길, 7.92km, 약340m) 12:26 – 돌길 끝 쉼터(8.55km, 약260m) 12:40 ~12:46 –우측 내리막계단으로 다리건너 구층암으로 – 오르막 세멘트길 -구층암(8.79km, 약285m) 12:52 – 뒤편으로 동백나무숲길 -의상암(앞쪽으로 널찍한 전망데크, 9.03km, 약280m) 12:55 –내려서서 삼거리(우측으로) - 구층암 –잠시후 우측으로 – 선등선원앞(출입금지구역, 9.39km, 약275m) 13:03 – 대웅전, 각황전(9.69km, 약255m) 13:11 –사사자삼층석탑, 적멸보궁(9.91km, 약275m) 13:16 – 되돌아 내려와 각황전(10.0km, 약255m) 13:18 – 보제루,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 – 화엄사 주차장(10.5km, 약215m) 13:27 ~13:35 – 백두대간 생태공원 주차장(중식) 13:40 ~14:05 – 구례,화엄사 톨게이트 14:16 – 익산분기점(호남고속도로) 15:10 – 벌곡휴게소(연료 23000원) 15:34 ~15:49 – 강서 하이패스(통행료 9500원) 16:26 – 청주 집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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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7암자 순례길
화엄사 암자 7곳 잇는 6km 코스
천연기념물 ‘홍매화’ 등도 볼거리
“걷는 맛 더해 힐링까지 얻어가”
밀물처럼 올라오고 있는 남도의 봄. 꽃과 나무가 흐드러진 조용한 지리산 산길을 걸으며 겨우내 움츠린 몸과 지친 마음을 펴는 것은 어떨까. 그 길의 끝에 구도의 길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전남 구례 화엄사(주지 덕문 스님) 칠암자 순례길은 트레킹과 순례 모두 즐길 수 있는 금상첨화 코스다. 지리산 둘레길의 미니어처 축소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칠암자 순례길은 화엄사 내 일곱 암자(지장암, 금정암, 내원암, 미타암, 보적암, 청계암, 연기암)를 잇는 약 6km의 호젓한 산길이다. 험하지 않은 데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끼고 있어 마음을 비우며 걷는 맛이 일품이다. 보통 가장 아래에 있는 지장암에서 출발하는데, 이곳에서는 높이 약 12m, 둘레 약 4m의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올벚나무(국가 유산 천연기념물·추정 수령 약 350년)를 만날 수 있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우기 때문에 올벚나무라고 부른다. 벚나무는 목질이 단단해 창과 칼자루로 많이 사용됐는데, 병자호란(1636년)의 치욕을 겪은 인조(재위 1623∼1649년)가 이후 전쟁을 대비해 많이 심게 했다고 한다. 당시 화엄사 벽암 선사가 이에 찬성해 절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지금은 이 한 그루만 남아있다.
화엄사에서 바로 가장 위에 있는 연기암(530m)을 먼저 오른 뒤 내려오는 코스도 있다. 화엄사∼연기암 길에서는 우렁찬 물소리를 내는 화엄사 계곡을 만날 수 있다. 봄여름 우거진 녹음 아래를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이 일품인데, 절로 힐링이 된다고 ‘치유의 숲길’, 화엄사 창건주 연기 조사가 어머니를 업고 올랐다고 해 ‘효심의 길’ ‘어머니의 길’로도 불린다. 연기암은 시원하게 펼쳐진 섬진강과 구례 시가지를 감상하는 최적의 장소다. 푸른 강과 지리산을 보는 눈맛이 그만이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운무를 볼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금정암은 화엄사를 대표하는 산내 암자. 조선 명종 17년(1562년) 설응 선사가 창건하고 고종 때 칠성각을 건립했다. 1991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93년 중건했는데, 화엄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미타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대문을 지나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 석상을 만날 수 있다. 절 내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가 말할 수 없는 포근함을 준다.
7암자 순례길 코스에는 없지만, 최근 국가 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사 경내 홍매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침 25일부터 한 달 동안 ‘제4회 화엄사 홍매화·들매화 사진 콘테스트’도 열린다. 현재 꽃망울이 맺힌 상태로 다음 달 중순쯤이면 만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화엄사가 있는 전남 구례에서는 다음 달 9∼17일 산수유꽃 축제도 열린다.
성기홍 화엄사 홍보기획위원장은 “화엄사가 화려하고 장엄한 아버지 같은 느낌이라면, 칠암자는 수줍음 많은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를 보는 듯한 매력이 있다”며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니아 사이에서는 걷는 맛, 보는 맛은 물론이고 힐링까지 얻을 수 있어 인기”라고 말했다.
[가람과 뫼]⑰지리산 화엄사와 산내 암자들
[불교신문3666호/2021년5월18일자]
박부영 기자
“사바세계 근심 고통 치유하는 천년 화엄성지”
숲 계곡 암자 어우러진 ‘화합 상생의 도량’
어른과 대중 극진 모시니 ‘수행공동체’ 살아나
지리산 화엄사는 ‘천년의 화엄성지’다. 연기 자장 의상 도선 등 고승이 ‘화엄’을 펼쳤으며, 오대 명산 중 한 곳으로 숭배했던 남악(南嶽)의 보물이었다. 천년 화엄 성지에는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로 불릴 정도로 산과 계곡 곳곳에 절이 들어섰다.
화엄사에서 성삼재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숲, 역사와 문화가 서린 사찰과 암자가 어우러지는 길은 들어서는 순간 몸과 마음이 순화되는 치유길이다. 계곡과 숲에서 발생하는 음이온 산소 햇볕에다 다양한 동식물이 서로 어울리며 뿜는 향기와 냄새 바람 물소리 바람소리가 지치고 힘든 마음과 몸을 저절로 치유한다. 그래서 길 이름이 ‘화엄계곡 치유 탐방로’다.
화엄사 입구에서 연기암까지 약 4km에 이르는 구간에는 암자가 줄 지어 섰고 암자마다 이야기를 담았다. 천년의 화엄성지 화엄사와 치유의 계곡과 그 주변의 암자를 찾았다. 4월 중순 맑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화엄사(華嚴寺)는 백제 성왕 22년(544) 인도 스님 연기조사가 대웅상광적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으며, 원효성사가 해회당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가 2층 4면 7칸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현재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742~764)대에 8원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 세계 면모를 갖추고 신라 말 헌강왕(875) 대에 도선국사가 동오층 석탑과 서오층석탑을 조성하여 화엄사는 이 땅 최고의 화엄성지였다.
고려대에서도 화엄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가람이었다. 태조는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으며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고 문종 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하는 등 고려 내내 화엄사 중창 불사가 이뤄졌다.
선교로 통합했던 조선조 화엄사는 선종대본산으로 그 위상을 이어갔다. 정유재란 때 남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관문 석주관에서 승병 300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선 호국도량이었다. 그러나 왜군이 그 보복으로 화엄사를 전소시켰다. 석조물을 남기고 전부 불탄 화엄사를 인조 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건물을 중수하고 숙종 대에 계파선사가 장육전 자리에 각황전을 건립하여 선교양종 대가람으로 다시 우뚝 섰다.
해방 후 빨치산이 지리산에 은거한 뒤 1950년 6·25전쟁까지 지리산의 수많은 당우가 사라졌지만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화를 비켜갔다. 조선 중·후기 중수한 대웅전 각황전 등 중요한 당우가 그대로 남아 오늘날 그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게 한 ‘화엄신중’은 차일혁 토벌대장이었다.
1948년 여순사건 주도자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칠불사, 연곡사가 전소되고 화엄사 지장암과 사하촌 여관마을이 불탔다. 1950년에는 내원암, 보적암이 파괴되고, 1951년에는 상원암, 보운암, 만월당이 소실됐다.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졌지만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이후 8사단이 새로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고, 1951년 5월 10일 군경합동작전회의에서 또 다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차일혁 부대장은 관할 지역이 아닌데도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부대장을 대신하여 화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문짝들만을 뜯어내 소각하는 것으로 명령을 수행했다. 화엄사와 구층암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차일혁 대장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늘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불교신자 답게 자비로웠다. 비록 적이었지만 이현상의 주검을 정중히 화장하고 권총 세 발을 예포로 쏘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이현상 주머니에서도 염주가 나왔다. 화엄사는 그 공덕을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화엄성지 천년 역사는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쉰다.
‘화엄십찰’ 중 한 곳으로 통일신라 말 해인사와 더불어 양대 화엄종찰로 번성했던 화엄사는 억불시대 조선에서도 선과 교를 모두 통괄하는 선교양종대가람이었다. 수많은 산 계곡과 강에서 흘러온 물이 바다로 흘러들 듯 반야 공 유식 선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화엄이다. 천년 화엄성지 답게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화합 융화의 전통은 오늘날 화엄사의 전통으로 면면히 계승된다. 용성, 동헌,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으로 이어지는 용성문도회 소속 화엄사는 화합문중의 모범이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평생 도반으로 함께 정진할 것을 약속한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의 권속이 오늘날 화엄사를 함께 일궈간다.
1969년과 1980년 두 차례 화엄사를 맡아 중창하며 오늘날의 화엄사의 기틀을 세운 도광스님은 지리산 보다 넓은 자비심으로 대중을 극진히 보살폈다. 범어사 해인사는 물론 문중 인연이 없는 용주사 파계사까지 6곳의 주지를 역임한 것도 이처럼 욕심 없이 대중을 외호한 성품 때문이다. 성품은 온화했지만 계행이 철저했으며 공사를 가림에 추상같았고 60이 넘어서도 은사를 극진히 모실 정도로 효상좌였다.
이러한 자비 인욕 청백가풍은 상좌들에게 이어져 종원(宗源,1984~1992), 평전(平典, 1992~1994), 종렬(宗烈, 1994~1998), 종걸(宗乞, 1998~2002), 종삼(宗三, 2005~2013)스님 등 상좌 스님들에게 이어졌다. 또한 도천스님 상좌 명선(明扇,1975~1980), 명섭(明燮, 2002~2005)스님이 이어받았다. 두 스님의 제자들은 서로 화합하면서 가람을 수호하고 산중의 화합을 이끌었다.
그리고 도광스님의 손상좌로 처음 교구를 맡은 현 주지 덕문스님에게 이어졌다. 스님은 얼마 전 만장일치로 주지 재임 소임을 부여 받았다. 노스님처럼 어른을 극진히 모시고 대중을 받들어 사회와 소통하고 종단 발전에 함께 노력한 결과다. 스님은 교구 중에서 가장 완벽한 승가복지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중 복지체계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른 스님들을 극진히 모시면서 대중이 마음 놓고 수행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수말사를 특정 스님이나 문파가 독점하지 않고 전 문중을 위해 복지기금으로 쓰도록 했으며, 오랫동안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됐던 천은사 입장료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사찰이 갖는 이익을 내려놓고 구례군민과 국민들 입장에서 바라본 결과다.
그리고 화엄사 전 대중 300명을 모두 만나 바람을 청취하고 꼼꼼히 기록하여 정리한 대중화합 섬김의 결과이다. 대중의 바람을 정리한 것이 승가복지 고승선양 광주포교당이며 이를 완성하는 소임을 2년차에 부여받았다. 그 기본 가치는 화엄이다. 스님은 “마음의 부조화로 사바세계의 고통과 근심 갈등 분열이 발생했으며 이를 치유하는 가치가 바로 화엄”이라며 “사바세계가 존재하는 한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우리 모두는 ‘꽃처럼 화사한 마음을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 우리 수행자의 일이며 화엄사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화엄사 일주문에서부터 ‘치유의 숲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따라 암자가 줄지어 섰다.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 곧 희망과 치유의 순례다. 화엄사 입구를 들어서면 일주문이 반긴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찬했던 그 일주문이다. 사천왕문 벽암각성대사비 박물관을 지나 보제루로 들어서면 말 그대로 화장세계가 펼쳐진다. 정면은 조선 인조 때 벽암대사가 중창한 대웅전이, 왼쪽에는 숙종 때 계파대사가 중수한 각황전이 맞이하며 통일신라대 탑과 석등이 순식간에 시계를 천년 전으로 되돌린다. 노고단이 경내로 들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茶禪一如 향기 품은 구층암 봉천암
대웅전을 지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대숲을 벗어나면 흑백 사진에서 보던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층암(九層庵)이다. 1961년 각황전을 중수할 때 주위에 널려 있는 부재를 수습하여 세운 삼층석탑이 원래부터 제자리 있었던 것처럼 당우와 조화를 이룬다. 댓돌 위에 신발이 여러 켤레다.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나 들러 차를 마시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다실이며 법이 오가는 설법전이다.
화엄사는 차(茶)가 가장 먼저 들어오고 사사자삼층석탑 공양인물상의 손에 든 공양물을 차로 보는 등 차 성지이기도 하다. 각황전 뒤편에서부터 구층암 봉천암 멀리 차일봉 능선에 이르기까지 야생차 산지다. 구층암은 ‘차 성지’ 화엄사의 오늘이다.
구층암은 한국불교사에 이름난 선원이었다. 1900년 청하탄정선사가 설선회를 설립하여 경허선사를 모시고 선원을 열었으며 근세 한국불교사 최초의 비구니 선맥(禪脈)으로 존경받는 법희스님이 용맹정진했다.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 전국적으로 이름난 선원으로 만든 주인공은 도광스님이다. 스님은 1969년부터 1975년 7월 까지 구층암과 봉천암에 선원을 개설하여 생사를 걸고 정진했다. 가행정진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걸망을 짊어지고 화주하여 선원을 외호하기도 했다. 스님은 담양 보광선원을 운영 할 때도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며 선원 운영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대중의 수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전강스님이 한 시절 조실을 지내고 일타스님도 방부를 들였던 전국에 이름난 선원이었다. 일타스님이 구층암에서 정진하던 당시 모습을 정찬주의 소설 <인연>에서 만날 수 있다.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00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였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일타는 모과나무 기둥 사이의 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천년 전으로 시간 되돌리는 화엄세계
구층암은 그 이전에도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대들보였다. 정법(正法)이 퇴색하던 조선 후기에는 강원으로 법을 지켰으며 조선불교가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던 구한말에는 60인이 수행하던 백련결사 도량이었다.
구층암과 함께 있는 봉천암도 그 역사를 함께 해왔다. 봉천(鳳泉) 이름에서 보듯 차(茶)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연기조사가 천축에서 마야차를 가져와 시음하고 화엄전(華嚴田)을 만든 것이 지리산 차의 시초다. 음력 2월 28일을 연기존자 기일로 삼아 사부대중과 신도들이 대웅상적광전에 모여 다례제를 지내며 추모 행사를 했으며 차 잎 따는 시기가 되면 스님들은 화엄전으로 가서 울력을 했다. 어느 날 화엄전 뒤 숲에서 환한 빛이 나는 것을 본 한 스님이 다가가 보니 봉황이 내려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샘을 만들면서 봉황이 왔다는 봉래암(鳳來庵)이라 이름 붙였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헌종 12년(1846) 후봉선사(嗅峰禪師)가 그 터에 중창하며 봉천암(鳳泉庵)이라 명명(命名)하고 운수납자가 용맹 정진하는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도광스님은 당신이 정진했던 구층암에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은사 동헌스님을 병간호하며 극진히 모셨다. 1983년 9월 구층암에서 동헌스님이 입적하고 이듬해 9월 도광스님이 이 곳에서 이생에서의 몸을 벗었다.
봉천암에서 대나무 숲을 지나 화엄사 계곡 치유의 길을 따라 나서 연기암으로 갔다. 화엄사에 4km 가량 떨어진, ‘치유의 길’ 끝에 자리한 연기암은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에 먼저 세웠던 암자로 알려져 있다. 화엄사의 모체인 셈이다. 이 곳에 서면 구례읍과 섬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마니차 문수보살 맞는 연기암
1980년대 은사 도광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은 종원스님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연기암을 다시 중창했다. 암자를 일으키면서 길도 새로 냈다. 암자 옆으로 난 샛길에 차가 다니는 길을 내면서 연기암에 이어 암자가 새로 들어섰다.
연기조사는 서기 544년 연기암을 창건하고 이후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을 창건하여 지리산 곳곳에 화엄사상을 펼쳤다고 한다. 화엄사적지에 나오는 이 창건연대는 정유재란으로 화엄사의 모든 기록이 소실된 뒤 쓰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창건주 ‘연기조사’는 공인된 역사다.
1978년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발문에 황룡사 연기(緣起)법사가 등장하면서 오랫동안 논란이던 ‘화엄사 창건주 연기법사’는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신라 수도 경주 황룡사와 백제권역 지리산 화엄사의 관계, 화엄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밝혀졌다. 자현스님(중앙승가대학 교수)은 2020년 12월 발표한 ‘화엄사 사적 창건기록의 타당성 분석’에서 “연기는 8세기 중반에 유행한 황룡사의 자장계 화엄의 전승자이며, 국가적인 후원 하에 호남의 안정과 신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황룡사를 떠나 호남에 화엄사를 개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6·25전쟁 당시 불탄 연기암을 1995년 원응당 종원스님이 복원했다. 대웅상적광전, 문수전, 관음전, 원응당, 적멸당 등을 지었다. 종원스님은 은사 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아 일주문 만월당 원융료 청풍당 등을 중창하여 가람을 일신했다.
은사 스님을 이은 현 주지 만해스님은 연기암에 또 다른 세상을 펼쳤다. ‘한 번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공덕과 같으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는 마니차(윤장대)를 만들고 화엄성지 화엄사와 지리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려 책을 든 대형문수보살 입상을 세웠다.
그리고 최근에는 화랑을 개원했다. 가람이 문화도량이어야한다는 주지 스님의 원력을 담았다. 연기암 문수갤러리 첫 전시는 법관(法觀)스님 작품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개인전을 열고 해외를 비롯 수많은 전시회에 특별 초대될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면서 은둔의 수행자다. 선과 점만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개척해온 스님은 추상화 단색화 선화 화가 승려 수행자로 불린다.
연기암을 나와 노고단 방향으로 올라가다 차일봉 아래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의 방문을 불허하며 꼭꼭 숨은 용혈암이다. 작은 집 한 채만 있는 이름 그대로 암자다. 스님 한 분이 수행 중이다. 홀로 밥하고 빨래하는 불편을 감내하며 인적이 끊긴 토굴에서 오직 참선 정진에 매진하는 수좌다. 몇 년을 있겠다는 기약 없이 공부에만 매진한다.
물소리 듣는 청계암, 미륵대탑 금정암
화엄사 산내 암자는 성산재와 보현봉 주변까지 분포해 있다. 노고단에서 1km 가량 떨어진 문수대와 1969년 도광스님이 중건한 묘향대 역시 화엄사 암자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 보호 차 접근을 막고 있다. 용혈암이 화엄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셈이다.
다시 연기암으로 내려가 그 아래 청계암 미타암 보적암 금정암 내원암 지장암을 찾아갔다. 대부분 연기암 복원과 함께 길을 낸 1990년대 이후 중창했다. 연기암에서 화엄천 다리를 지나면 청계암이 나온다. 청계(聽溪),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법당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다. 1992년 종경스님이 요사채를 창건했으며 현재는 화엄사 주지와 초심호계원장 등을 역임한 종단 어른 종걸스님이 주석한다.
청계암에서 다시 내려오다 200m 가량 위로 올라가면 보적암(寶積庵)이 나온다. 조선 인조 8년(1630) 일어선사가 개창 한 후 1989년 종지스님이 중창하여 현재 주석중이다. 경내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법당과 요사채 종무소 건물이 보인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 위로 200m 가량 가면 넓은 경내에 아늑하게 자리한 암자가 나온다. 미타암이다. 절 입구에는 석조 불상 세 기가 서 있고 그 앞에 연못이 있다. 2001년에 복원했다. 비구니 암자다. 원래 비구니 스님들은 금정암에 있다가 미타암으로 옮겼다 한다.
다시 화엄사를 향해 내려가면 작은 암자 하나가 길에 서 있다. 각종 문화 강좌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스님과 신도들이 경내에 서서 무언가를 논의하기에 인사했더니 스님 말씀이 “지금까지 내가 주지했는데 이제 다른 스님이 주지”라며 소개를 하더니 사라진다. 천진한 아이와 같은 얼굴과 미소를 지닌 보기만 해도 따뜻한 스님이다. 2008년 지암스님이 복원했다. 오늘부터 내가 주지 아니라던 그 스님인 듯 했다.
그 아래 금정암(金井庵)은 화엄사를 대표하는 산내 암자다. 조선 명종 12년(1562) 설응선사가 창건하고 고종 때 칠성각을 건립했다. 1991년 화재로 소실 된 후 각심스님이 1993년 중건하고 1998년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종렬스님이 중창했다. 화엄사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곳에 있고 예전에는 선원의 역할을 했다. 5층 미륵전이 눈길을 끈다.
화엄사 일주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암자가 나온다. 지장암이다. 70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주석한다. 오래된 분위기가 나는 작은 암자다. 불심 깊은 속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출가해 평생 지장암을 떠나지 않고 부처님을 모시며 정진하고 있다.
‘시의 공원’에서 만나는 치유와 화합
유일하게 화엄사 아래 위치한 암자가 남암(南庵)이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종삼스님이 2012년 복원했다. 남암 경내에서 서면 노고단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자는 넓고 정갈했다.
남암 입구는 ‘시의 동산’이다. 이원규 시인을 비롯한 지리산과 화엄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시와 목탁 등 조각 작품을 전시한 야외 문화 공간이다. 이 곳이 너무 좋아 매일 출근하듯 공원에 와서 머물며 사색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과 고통의 땅에서 화합과 치유의 땅, 평화의 산과 계곡을 염원하는 마음을 시의 동산으로 형상화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의 말처럼 세상은 본래 밝고 행복한 살맛나는 세상임을 화엄사와 치유의 숲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듯 했다.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지리산 화엄사 암자순례길
광주매일신문 기사 등록일 : 2022. 11.15(화)
자연을 닮아가는 길, 부처에게로 가는 길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수많은 사찰을 품고 있다. 큰 절만 손꼽아 봐도 화엄사를 비롯하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대원사, 실상사, 벽송사 등이 쉽게 떠오른다. 산내 암자까지 헤아려보면 그 숫자 가늠이 안 된다. 오늘은 천년고찰 화엄사와 산내 아홉 암자를 순례하려고 한다.
화엄사로 들어가는 도로에는 단풍나무 가로수가 붉게 물들어있다. 일주문을 거쳐 금강문, 천왕문을 통과하면서 점점 부처의 세계로 스며들어간다.
보제루 옆을 돌아서니 큰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대웅전과 각황전 등 화엄사의 중심전각이 위엄을 드러낸다. 화엄사의 대표적인 전각인 대웅전(보물 제299호)과 각황전(국보 제67호)은 건물 규모도 장대하지만 높은 석축위에 있어 마당에서 올려다보니 더욱 웅장해 보인다.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국보 제336호)에 절을 올리며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지 못한 나를 참회한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지만 각황전이 더 크고 당당한 위용을 갖추고 있다. 대웅전과 직각을 이룬 위치에 있는 각황전은 건물 자체도 웅장하지만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각황전 앞에는 높이 6.4m에 이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국보 제12호)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는 화엄사에 올 때마다 각황전 뒤쪽 높은 곳에 있는 4사자삼층석탑에 오르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7년여 보수공사를 끝내고 작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됐으니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으로 108계단을 오른다. 4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이 있는 곳은 효대라 불리는데, 화엄사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화엄사 전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색으로 물든 산속의 화엄사가 화엄세상처럼 펼쳐진다. 4사자석탑이라는 이름은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모습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님의 위엄과 지혜를 상징한다.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구층암으로 향한다. 시누대 푸른 잎 위에서 붉게 물든 단풍이 더욱 화사한 색상을 드러낸다. 단풍나무들 사이로 스님들의 참선공간인 선등선원이 바라보인다. 우아한 색상의 단풍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는 선승의 법열(法悅)처럼 느껴진다.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묵언하며 10분쯤 걸었을까? 삼층석탑과 함께 구층암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구층암에서는 1천 불상을 모신 천불보전 앞 요사채를 받치고 있는 모과나무 기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뒤틀리고 굽어있는 모과나무 기둥은 늙은 고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천불보전 앞에는 살아있는 모과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죽은 모과나무 기둥과 살아있는 모과나무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불생불멸의 이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의상암을 거쳐 화엄사계곡을 건너 연기암 가는 길을 만난다. 그윽한 숲길이 인도하는 대로 발길을 옮긴다. 고요한 숲길을 걷고 있으니 새소리, 물소리가 목탁소리처럼 들려온다. 부처에게로 가는 길은 자연을 닮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나무와 물은 이미 해탈한 부처에 다름 아니다.
연기암에 도착하자 화려한 단풍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연기암은 화엄사의 원찰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백제 성왕 때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곳에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법문을 설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돼 4백 여년 동안 폐허상태로 있다가 1989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연기암에 들어서니 거대한 문수보살입상이 중생을 맞이한다. 높이 13m에 달하는 연기암 문수보살상은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을 바라보며 화엄법문을 설하고 있다. 암자 앞마당에는 거대한 마니차가 서 있다. ‘옴마니반메움’을 주문하면서 마니차를 세 바퀴 돌렸다.
문수전에서 100m 쯤 떨어진 관음전 가는 길에는 잘 물든 단풍이 화사하게 빛난다. 천수천안을 가진 관음보살이 자애로운 손길을 내미는 것 같다.
연기암을 출발해 임도를 따라 걷는다. 호젓한 임도가 마음을 비우고 걷기에 그지없이 좋다. 둘이 도란도란 애기하며 걷기에도 좋지만 혼자서 조용히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청계암 입구에 도착했다. 청계암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낙엽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때 아름답다고 가르쳐주는 것 같다. 암자 옆으로 실개천 수준의 계곡물이 흘러간다. 청계암(聽溪庵)이라는 이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생의 작은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경지를 가지라는 뜻일까?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혼자 걷고 있으니 나무들이 말을 걸어온다.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대화일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언어란 바로 말없는 말이고, 말의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무위의 언어다.
임도에서 벗어나 보적암으로 가는 굽어진 길을 걷는다. 보적암은 대웅보전과 몇 채의 당우들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커다란 돌배나무 한 그루가 석탑을 대신하고 있다. 암자는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일 것이다.
화사하게 빛나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미타암 표지석이 길안내를 해준다. 임도에서 200m 쯤 들어가자 석조불상 세 기가 맞이한다. 불상 옆 조그마한 연못에는 수련 잎이 떠 있다.
미타암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미타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임도변에 내원암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내원암은 다른 암자에 비해 소박한 모습이다.
천년고찰 금정암으로 들어선다. 금정암은 화엄사를 대표하는 산내 암자다. 금정암은 천년고찰이라 하지만 1991년 화재로 소실 된 후 1993년과 1998년 두 차례 중건했다. 금정암에서는 나무 사이로 화엄사 당우들이 바라보인다. 금정암은 당우들이 화려한 편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3층 목탑형식을 띤 극락보전이다. 대웅전격인 반야보전의 화려한 단청과 아름다운 문살 등도 눈길을 끈다.
화엄사주차장으로 내려선다. 화엄사계곡에서는 정제된 계곡물이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계곡 바위에는 낙엽들이 사뿐히 앉아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낙엽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름다운 삶이 곧 아름다운 내려놓음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장갑수·여행작가>
※여행쪽지
▶지리산 화엄사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사찰이다. 화엄사는 수많은 산내 암자를 갖고 있는데, 화엄사에서 시작해 아홉 암자를 순례할 수 있는 암자순례길이 있다.
▶코스 : 화엄사주차장→화엄사→구층암→의상암→연기암→청계암→보적암→미타암→내원암→금정암→지장암→화엄사주차장
▶거리, 소요시간 : 7㎞, 3시간30분 소요(관람시간 포함)
※출발지 내비게이션주소 : 화엄사주차장(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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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집 06:45
오늘은 구례 화엄사 주변에 있는 암자순례길을 가기로 한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자연속에 있는 암자나 사찰을 가는 것은 싫어하지는 않는다. 도심속에 혼잡하게 있는 교회보다는 자연속에 묻혀 있는 암자가 한적하기도 하고 느낌도 좋다. 그렇다고 절하고 기도하지는 안치만 마나님은 그래도 기도는 한다. 화엄사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정유재란을 겪었고 6.25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했으며 여순사건때는 빨치산이라는 동족상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찰중에서 많은 역사와 화마를 가장많이 입은 곳이 화엄사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평탄하게 이어지는 임도길을 따라 즐길 수 있는 화엄사 암자 순례길을 모처럼 가기로 한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집에서 06시 45분 출발한다.
화엄사 주차장(해발 약215m) 09:20 ~09:33
청주 집을 출발하여 강서 하이패스로 진입하여 경부,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1시간 가량을 달린후 여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후 연료도 가득채우고 다시 출발을 하면 잠시 달려 익산분기점에서 우측으로 빠져 완주 순천간 고속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게 된다. 이도로는 차량이 많지를 않아 한가롭게 달린다. 많은 터널이 있는 동전주~임실구간을 지나고 이후 오수, 남원을 지난후 구례 화엄사 톨게이트로 빠져나가 우측 구례방향으로 달린다. 4~5km쯤 달리다가 좌측으로 소로길로 접어 들면 양쪽으로 벚나무가 심겨진 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진행하면 백두대간 생태공원앞을 지나 잠시후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좌측으로 진행하면 커다란 주차장이 있고 여기서 계속 화엄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일주문을 지난후 우측으로 잠시 들어가면 화엄사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비, 입장료가 무료라 예전보다 한결 좋아졌다.
지장암(0.260km, 약245m) 09:39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여러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잠시 다녀올 때 다녀오고 트레킹준비 간단히 하고 우측편 세멘트길을 따라 올라가면 몇 미터를 올라서서 섬진강이 보이는 곳 천년고찰 연기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좌측 화엄사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우측으로 지장암 100m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세멘트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서면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은행이 여기저기 무수히 많다. 굵직한 은행나무는 빙 둘러서 껍질을 벗겨 놓았으나 은행나무는 아직도 잘 자라고 있다.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은 나무를 죽이려는 것인대 은행나무는 그래도 이를 무릅쓰고 잘자라고 있다. 잠시 절마당에 올라서면 지장암이 쓰여진 작은 암자 한 채가 있다. 뜰앞 대돌에 항아리 3개가 놓여 있다. 나이 많으신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계시다고 한다. 중축한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깨끗한 작은 암자다. 불심 깊은 속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출가해 평생 지장암을 떠나지 않고 부처님을 모시며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금정암(1.63km, 약315m) 10:05
지장암에서 나와서 연기암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오르막 첫머리는 세멘트길이지만 차츰 지나면서 부터는 보도블럭길로 깨끗하고 널찍한 길이다. 아침 기온이 쌀쌀함에도 많은 분들이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15분 가량을 진행하면 좌측으로 화엄사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일즈음 좌측 화엄사 방향으로 내려서는 데크계단길이 나온다. 이길은 아래쪽 둘레길과 연결이 되는듯하다. 이후 4분여 더 진행을 하니 금정암 입구에 닿는다. 급하게 올라가는 세멘트길을 따라 올라서면 엄청난 돌축대와 정자가 보이고 그 위에 높다랗게 세워진 사찰에는 3층으로 날아갈 듯 세워진 극락보전 건물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안쪽에는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좌측으로 대웅전이 있으며 우측으로 금정암 요사채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위쪽으로 작은 산방이 있다. 암자는 역사는 깊다고 하지만 건물들은 중축한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며 축대는 커다란 돌로 쌓았으며 그 위쪽으로 쌓은 돌담은 마추피츄로 들어가기 전 쿠스코에서 보던 돌쌓기 형태와 흡사하다. 금정암은 1991년 화재로 소실 된 후 1993년과 1998년 두 차례 중건했다고 한다.
내원암(길 우측편으로 작은 암자, 2.34km, 약320m) 10:21
금정암에서 내려와 3번째 암자로 향한다. 여기서 부터는 비포장 임도길이다. 임도길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비포장임도를 따라 10여분 진행하니 임도길 우측으로 돌계단 몇 개를 올라서니 내원암에 닿는다. 절마당에 석조좌불이 한분 앉아 있다. 내원암이라 적힌 일자형태의 작은 암자다. 좀 주변이 지저분하다할까 소박하기도 하고 좌측으로 요사채 한 채가 있는 아주 작은 암자다.
미타암(한옥형태의 규모는 보통임, 2.88km, 약360m) 10:32
내원암에서 비포장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4분여 진행하니 우측으로 급하게 꺽이는 임도길 좌측으로 연기암으로 가로질러가는 가까운길이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꺽어서 잠시 올라서면 미타암 입구에 닿는다. 여기에는 이정표가 있다. 미타암 0.2km, 화엄사 1.8km, 청계암 1.6km, 연기암 2.1km가 적혀 있다. 모처럼 임도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는 암자다. 서서히 올라서면 절마당 앞쪽으로 석조 불상 세 기가 서 있고 그 앞에 연못이 있다. 2001년에 복원했다. 비구니 암자다. 원래 비구니 스님들은 금정암에 있다가 미타암으로 옮겼다 한다. 한옥형태의 아담한 사찰로 좌측 요사채에서는 여스님이 나무로 불을 지피며 무엇인지 끊이는 모습도 보인다. 대웅전은 생각보다 상당히 작지만 양쪽으로 전각이 있고 아래쪽으로 커다란 요사채가 있는 그래도 규모가 작지않은 암자다. 절마당 입구에 토굴로 들어가는 철문이 보인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천연냉장고로 보인다.
보적암(신축중인 암자, 형제봉 등산로 입구, 4.04km, 약415m) 10:51
미타암에 돌아 나와 다시 비포장 임도길을 따라 진행하면 이제 지리(전남) 28-4번 표지목이 나오고 해발350m가 적혀 있다. 여기서 거의 평탄하게 이어지는 임도길을 따라 진행하면 세멘트길이 시작되고 대략 50m를 가면 임도길이 좌측으로 급하게 휘돌아가는 곳 우측으로 보적암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조금 가파르게 오르는 세멘트길을 따라 오르면 지금 막 중축중인 전각도 있는 건물 전체가 깨끗하니 산뜻한 것이 중축한지 얼마되지 않은 암자로 보인다. 보적암은 높다란 돌 축대위에 세워져 있으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깨끗한 대웅보전과 요사채 종무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커다란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조선 인조 8년(1630) 일어선사가 개창 한 후 1989년 종지스님이 중창하여 현재 주석중이라 한다. 보적암에서 비등구간이지만 형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청계암(아담한 찻집같은 암자 2채, 5.58km, 약440m) 11:22
보적암에서 내려와 청계암으로 향한다. 여기부터는 보도블럭길로 길이 매우 좋다. 천천히 걷노라면 지리28-05번 표지목을 지나 대략 15분 가량을 걸어서 청계암 입구에 닿는다. 우측으로 세멘트길을 따라 올라간다. 입구에 연기암 0.9km, 우측으로 청계암이라 적혀 있는 이정표가 있다. 잠시 올라서면 차고가 나오고 차고 뒤편으로 토굴입구가 보인다. 천연냉장고를 설치한 것 같다. 여기서 빙판을 지나 좀 더 오르면 작은 계류가 흐르는 골짜기 건너편으로 작은 암자 2채가 보이는대 암자로 보이지 않고 찻집으로 보이는 깨끗하고 앙증맞은 암자다. 법당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로 1992년 종경스님이 요사채를 창건했으며 현재는 화엄사 주지와 초심호계원장 등을 역임한 종단 어른 종걸스님이 주석한다고 한다.
연기암 관음전, 6.54km, 약480m) 11:42 ~11:57
청계암에서 나와 세멘트길을 따라 진행하면 지리(전남) 28-7번 표지목을 지나고 3분여 더가면 지리산 노고단으로 오를 때 우측으로 물길을 돌린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이물길을 무넹기라한다. 이물길은 화엄사계곡을 따라 흘러 결국 이곳 다리아래로 흘러서 산수유 마을 방향에서 흐르는 사시천과 합류하는 섬진강 부근에서 같이 합류를 하여 섬진강으로 흐르게 된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잠시후 화엄사에서 노고단 방향으로 오르는 등산로길에 닿고 등산로를 건너서 잠시가면 찻집이 있고 이후 좌측으로 주차장, 우측으로 연기암 대웅전방향이다. 입구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면 거대한 문수보살입상이 맞이한다. 높이 13m에 달하는 연기암 문수보살상은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을 바라보며 화엄법문을 설하고 있다. 계단으로 올라서 좌측으로 가면 대웅상적광전이라 적힌 대웅전에 해당하는 법당이 나온다. 그 아래쪽 앞마당에는 거대한 마니차가 서 있다. 좌측편 문수전 앞을 지나 뒤편으로 좀더 가면 관음전이 끝을 장식한다.
“연기암은 화엄사의 원찰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백제 성왕 때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곳에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법문을 설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돼 4백 여년 동안 폐허상태로 있다가 1989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1980년대 은사 도광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은 종원스님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연기암을 다시 중창했다. 암자를 일으키면서 길도 새로 냈다. 암자 옆으로 난 샛길에 차가 다니는 길을 내면서 연기암에 이어 암자가 새로 들어섰다.
6·25전쟁 당시 불탄 연기암을 1995년 원응당 종원스님이 복원했다. 대웅상적광전, 문수전, 관음전, 원응당, 적멸당 등을 지었다. 종원스님은 은사 스님을 이어 화엄사 주지를 맡아 일주문 만월당 원융료 청풍당 등을 중창하여 가람을 일신했다.
은사 스님을 이은 현 주지 만해스님은 연기암에 또 다른 세상을 펼쳤다. ‘한 번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공덕과 같으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는 마니차(윤장대)를 만들고 화엄성지 화엄사와 지리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려 책을 든 대형문수보살 입상을 세웠다.”
문수전앞에서 커피한잔 마시고 내려오며 마니차 3바퀴 돌리는데 쉽지가 않다.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연기암의 경치와 겨울임에도 양지바르고 따스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돌길 끝 쉼터(8.55km, 약260m) 12:40 ~12:46
화엄사∼연기암에 이르는 길은 ‘치유의 숲길’ ‘어머니의 길’이라 한다. 사시사철 우렁찬 물소리를 내는 화엄사 계곡을 만날 수 있고 봄여름 우거진 녹음 아래를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이 일품인데, 절로 힐링이 된다고 ‘치유의 숲길’, 화엄사 창건주 연기 조사가 어머니를 업고 올랐다고 해 ‘효심의 길’ ‘어머니의 길’로도 불린다.
연기암에서 내려서는 이 길을 따라 내려서게 된다. 대부분 돌길로 이루어진 길로 널찍하니 잘 다듬어진 길이다. 길 양쪽으로는 가는 대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머리 돌계단을 내려서면 서어나무쉼터 이정표가 나온다. 화엄사 1.9km가 적혀 있다. 이제 서서히 내려서는 돌길을 따라 5~6분을 내려서면 어은교와 어진교를 연달아 건넌다. 이후 10분을 좀더 내려서면 용소이정표에 닿는다. 좌측으로 둘레길이 시작되고 화엄사길은 돌길을 따라 내려서면 된다. 화엄사 1.0km가 남았다. 길은 역시 돌길이 이어지면 가는대나무숲도 같이 펼쳐진다. 이렇게 내려서면 돌길 끝 커다란 나무에 둥그렇게 만든 쉼터에 닿는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화엄사 구층암으로 이어지는 길에 닿는다. 여기서 잠시 커피한잔 마시고 쉬어 간다.
의상암(앞쪽으로 널찍한 전망데크, 9.03km, 약280m) 12:55
큰나무 둥근 쉼터에서 휴식후 우측 데크계단을 내려서서 다리를 건넌후 우측으로 세멘트길을 따라 조금 가파르게 오르면 정면길은 가지말라고 되어 있고 우측으로 잠시 가면 구층암이다. 오래된 목조건물로 시골집 같이 생긴 암자다.
“구층암(九層庵)이다. 1961년 각황전을 중수할 때 주위에 널려 있는 부재를 수습하여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구층암은 한국불교사에 이름난 선원으로 근세 한국 불교사 최초의 비구니 선맥으로 존경받는 법희스님이 용맹정진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00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가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구층암 봉천암 멀리 차일봉 능선에 이르기까지 야생차 산지다. 구층암은 ‘차 성지’ 화엄사의 오늘이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구층암에서 몇발자욱을 옮기면 봉천암이다. 옆으로 동백나무 숲 아랫길을 따라 가면 의상암에 닿는다. 새롭게 지은 암자로 찾집같이 아담안 절집이다. 고무신 한 켤레가 대돌에 놓여있다. 잠시 내려서면 앞마당으로 쓸겸 놓여 있는 널찍한 전망데크가 나온다.
화엄사 주차장(10.5km, 약215m) 13:27 ~13:35
의상암 데크전망대에서 내려서면 대나무숲 삼거리다. 여기서 좌측길은 어디로 빠지는지는 몰라도 우측으로 잠시 가면 구층암으로 다시 올라온다. 구층암에서 나와 세멘트길에서 우측으로 깔개길을 따라 가면 각황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잠시 우측으로 대나무숲을 빠져나가면 선등선원이라고 하는 출입금지구역이다. 앞쪽에서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내려서면 삼전이라고 하는 건물이 좌측으로 보이고 계단을 내려서면 우측으로 대웅전이 나오고 이어서 각황전이 나온다. 대웅전은 보물로 지정되었고, 대웅전에 모셔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국보다. 각황전도 국보이며 각황전 앞 석등도 국보이다. 각황전을 돌아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절멸보궁 우측편으로 사사자 삼층석탑이 나온다. 사사자삼층석탑도 국도다.
사사자 삼층석탑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에 비견될 만한 이형(異形)의석탑인데 원통전 앞에도 비슷하게 생긴 사자탑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이 탑은 각황전 옆쪽에 나있는 108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석탑과 앞에 있는 좀 작은 석등인 효대(孝臺)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만들었다고 한다. 석탑의 형식만큼이나 특이한 것은 석탑과 효대 내부에 각각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석상이 있다는 점이다. 석탑 안에 서 있는 것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효대 안에서 석탑을 향해 꿇고 예배하는 것이 연기조사라 전해지고 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효심을 감동스럽게 표현한 예술품으로 화엄사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를 각황전보다 이 석탑을 꼽는 사람도 많다.
각황전 중건 설화
본래 각황전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 선사는 문득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비로소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여!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 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를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 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 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 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파 선사는 대중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산내 스님들과 대중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한 계파선사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대웅전에 차려놓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벌써 승려 열댓 명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 대중을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고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험을 아직 안 한 누가 없을까?‘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 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마다하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손을 푹 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럴 수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화엄사 공양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이적입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밖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은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주로 정해진 바에야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맡은 바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자꾸 머릿속으로 되뇌며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덧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러더니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실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아! 이는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이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비로소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고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을 듯 싶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 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여러 생각들을 자유로이 해보았다.
어젯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사실 그 일도 다 풀린 일이 아닌가. 적어도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큰 벼슬을 사는 대감을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풀리게 되겠지하고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길을 가는데 진짜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 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던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누더기를 걸친 거지 할머니였던 것이다. 화엄사 앞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씩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지경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공양주보살은 지난밤 꿈만을 믿고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엎드려 말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이제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그러시더니 이제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옵소서!“
거지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공양주보살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거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말했다.
"지리산의 문수보살님이시여!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가피를 내려주소서!“
거지 할머니는 수십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외더니 순간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지리산 깊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 거지 할머니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저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공양주보살은 어쩌다가 장육전 화주가 되어 애매한 생목숨 하나를 죽게 하였구나 생각하고는 큰일이다 싶어 마구 달아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새 육 년이 지났다. 한양 땅으로 도망가 주막집에서 막일을 하고 살던 공양주보살은 어느 부인의 심부름으로 창덕궁 앞에 나가게 되었다. 손님 하나를 만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궁 안에 살던 어린 공주가 유모와 함께 창덕궁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하는 어린 공주는 길가를 아장아장 달려 다니며 뛰어 놀았다. 그 옆에 서있던 공양주보살은 그 어린 공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 공주가 공양주보살을 알아보고 낡은 옷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우리 공양주보살님!“
그 어린 공주의 눈빛은 정말 공양주보살을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 공주를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이상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린 공주의 손을 공양주보살이 만지자 그대로 펴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주의 펴진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져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숙종대왕에게 전해졌다. 숙종은 공주를 낳고 손이 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양주보살의 손이 닿자 펴지고 그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숙종은 공양주보살을 곧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숙종 앞에 나선 공양주보살은 절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거지 할머니의 진실된 원력이 결국 공주로 환생하게 하였구나! 내 공주를 위하여 모든 비용을 내겠도다!“
숙종은 감격하여 말했다. 그러면서 장육전 중창을 할 비용을 바로 하사하였다. 장육전이 완성되자 숙종은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각황전이라는 사액의 뜻은 부처님을 깨달은 왕,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양주보살은 각황전 건물이 완성되는 날 먼 옛날 그 거지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만 아는 깊은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각황전처마위로 펼쳐진 지리산과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숙종에겐 슬하에 공주가 없었고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은 민중의 야사이다.
법철스님에 따르면 공양주보살은 거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아에 쫓겨 청나라까지 흘러가게 되고 저 공주는 청나라 강희제의 딸이라고 한다. 강희제가 시주를 하고 숙종 임금이 도왔다는 설. 그래서 각'왕'전이 아니라 각'황'전이라 한다.
사사자 3층석탑을 들러 적멸보궁앞을 둘러본후 다시 내려서면 각황전이다. 이제 화엄사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며 내려서면 종루도 보이고 보제루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을 거쳐 화엄사 경내를 벗어나 바로 앞쪽 다리를 건너면 지장암 앞에 닿고 잠시 샛길로 내려서면 화엄사 주차장에 닿는다. 이렇게 하여 화엄사 암자 순례길을 재미있게 마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다가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잠시 가면 백두대간 생태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라면을 끊여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후 다시 진행을 하여 구례 화엄사 톨게이트로 진입하여 열심히 달려 익산분기점에 닿고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벌곡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후 연료를 다시 가득채우고 달리면 오늘은 시간이 조금 일러서 인지 서대전인터체인지부근도 막히지 않아 쉽게 통과를 하여 강서하이패스로 빠져나와 집에 도착을 하니 16시 40분이다. 오늘 날씨도 춥지 않고 좋았고 순례길돌아보기 좋았다. 봄철 화엄사에 유명한 홍매화가 필때쯤 돌아보면 또 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트레킹 시간 : 3시간 54분
트레킹 거리 : 10.5km
연료비 : 4만원
통행료 : 왕복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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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7암자순례길
청주 ~ 구례화엄사 주차장(구례군 마산면 연기암길5, 황전리12-1) : 206km 2시간 10분 9600원
천은사 주차장 :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63-1
지리산 치즈랜드
1.산행지:지리산 화엄사 암자 순례길
2.산행일자: 2024년11월20일
3.산행코스:
A코스:화엄사주차장-화엄사-구층암-의상암-연기암-청계암-보적암-미타암-내원암-금정암-지장암-화엄사주차장 약7Km 5시간
▶코스 : 화엄사주차장→화엄사→구층암→의상암→연기암→청계암→보적암→미타암→내원암→금정암→지장암→화엄사주차장
▶거리, 소요시간 : 7㎞, 3시간30분 소요(관람시간 포함)
※출발지 내비게이션주소 : 화엄사주차장(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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