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2000년 부터)

1195 캄보디아 앙코르왓, 베트남 사파, 하롱베이 여행2020.01.21.~26 화~일요일( 사파트레킹및 판시판산, 하롱베이)

산야55 2023. 2. 12. 06:52

,, 캄보디아 앙코르왓, 베트남 사파, 하롱베이 여행

2020.01.21.~26 ~일요일

 

참석인원 : 20

우리집 4, 셋째내 내외, 넷째내 내외, 막내내 4, 신옥우 박경자, 박순녀 김성 회, 이남숙 자매, 이규현 신예옥

 

1일차

20200121일 화요일 맑음

청주 04시 출발

이번 캄보디아 앙코르왓트와 베트남 사파, 하롱베이여행은 작년 명절 때 형제들이 결정한 일로 난 반대를 했으나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진행하기로 하였다.

여행일정은 서로 이해충돌이 있었으나 서로 한곳씩 양보하여 골고루 넣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동경로가 잘 맞지 않아 힘든 여행일정이 되었다.

이동경로가 많다보니 경비면에서도 더 들고, 또한 같은 아시아권으로 구정연휴가 함께 있어 식당등 쉬는 곳이 많기 때문에 여행경비는 훨씬 더 많이 잡힌 것 같다.

어쨌든 사파를 노래하며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오늘 출발 날이 되었다.

아직은 추운계절인 만큼 옷 차림등 준비물이 더 많이 필요하고, 감기등 건강관리에도 힘든계절인 만큼 준비할 약등 필요한 물품이 더욱 많다.

1530분경 버스가 출발장소에 도착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우리는 하나 둘 모여 정확히 16시 청주를 출발한다.

 

영종도 식당(보문항) 06:20 ~06:42

청주를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여 30여분을 달려 천안 목천톨게이트로 빠져나가 천안삼거리를 지나 천안 톨게이트 전에 있는 하늘공원 앞에서 이남숙여사 동생분을 태우고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가 달리면 명절 휴가 전이지만 아직은 길이 밀리지를 않아 잘 달린다. 어느새 인천부근을 지나고 인천대교를 건너서 청주를 출발한지 2시간 20분이 지나서 영종도 보문항 식당에 도착한다. 여기서 아침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인천공항 도착 06:55

보문항 식당에 도착하여 시원하게 끊인 김치찌개로 아침식사를 하고 이제 공항으로 출발한다. 보문항 식당에서 15분가량을 가면 인천 제1공항에 도착한다.

 

인천공항 출발 10:40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우리는 잠시 대기를 하고 이사장님이 여권 챙겨서 비행기표 빼오는대 시간이 다소 걸린다. 한참을 기다려 이사장님이 도착하여 비행기표와 여권을 건네 받고 베트남 항공 카운터에 도착하여 각자 큰 짐을 부치고 좌측으로 이동을 하여 출국 수속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여 들어가는 대 까지 대략 1시간이 소요된듯하다. 이후 통로를 따라 우측으로 이동을하여 지하로 내려가서 열차를 타고 제2공항으로 이동을 한다. 열차는 대략 5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며 약 2분이면 제2공항에 도착을 하게 된다. 이곳에 내려 다시 위로 올라가 109번 게이트에 도착하여 비행기 탈 준비를 마친다. 여기서 1시간 30분가량을 기다려 10시 보딩을 마친후 우리는 베트남 항공에 탑승을 한다. 탑승완료후 베트남 항공은 5분이 늦은 104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다.

 

하노이공항 도착 13:55

비행기가 출발하여 17분후인 1057분 드디어 하늘로 솟구쳐 올라 인천공항을 벗어난다. 베트남 항공은 VN417편으로 우리는 대부분 꽁무니 부근인 37~40열 사이에 탑승을 하였다. 이 항공기는 B787-10기로 귀빈석 24, 일반석 343, 367석으로 비교적 대형기에 속한다. 인천에서 하노이까지는 약 5시간이 걸리며 비행속도가 매우 느려 시속 약650k/h대로 운항을 한다. 기내식으로 베트남 쌀국수, , 빨간통 맥주(BIA HA NOI), 와인, 오랜지쥬스를 비롯한 음료수등이 나온다.

5시간의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비행기는 현지 시간(시차 2시간) 1346분 착륙을 하여 하노이 공항에 10분후인 1355분 도착을 한다.

 

하노이공항 출발 17:55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여 가장 늦게 나간 우리들은 입국대를 거치지 않고 직원 한분이 앉아 있는 통로를 통하여 환승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검색대를 통과하여 잠시 후 입국장에 도착하여 30번 게이트에 도착하니 3시간가량을 기다려야 한다.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광경 더러는 면쇄점을 돌기도 하며 장장 3시간을 기다려 1720분경 보딩을 한 후 항공기에 탑승을 한 후 1755분 출발을 한다.

우리가 타려던 항공기는 이보다 약1시간 빠른 VN839편이 었으나 손님이 적어서 인지 뒤 항공기와 합쳐서 간다고 하여 1시간이 늦게 출발을 하였다.

 

캄보디아 씨엘립 공항 도착

하노이 공항에서 캄보디아 씨엘립 공항까지는 약 1시간 50분이 소요되며 우리가 타고 간 항공기는 VN843편이다. 여기서도 간단하게 빵과 야채가 곁들인 치즈 과일이 간식으로 나온다. 비행시간이 길지 않아 적당한 시간에 씨엘립공항에 1941분 착륙하여 공항이 그리 크지를 않아 1945분 공항입구에 도착을 하여 항공기에서 내려 걸어서 공항 청사로 들어간다. 입국비자 받고 수속하는 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오래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편법으로 현지 경찰을 통하여 입국수속에 필요한 서류를 경찰에게 건네주고 옆문으로 간단히 통과 하였는대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캄보디아

인도차이나반도 남쪽 메콩강 하류에 위치한 인민공화제 국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고 일본 패전 후 19475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53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내용

정식명칭은 캄보디아왕국(The Kingdom of Cambodia)으로 1993년 입헌군주제로 복귀했다.

수도는 프놈펜(Pnompenh)이다. 면적 181035, 인구 15708756(2015년 현재)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 평원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로,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남서쪽으로 시암만(:타이만)에 면한다. 국명은 프랑스어()'Cambodge'를 영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고대의 깜부자(Kambuja; 앙코르) 왕국에서 유래했다. 1975년에 폴포트(Pol Pot)가 이끈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 시절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킬링필드)이 이루어져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행정구역은 20개주(khaitt), 4개 크롱(krong)으로 되어 있다.

 

공용어는 크메르어이고, 종족은 크메르족(90중국인(5기타(5)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교는 국민의 95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6세기 캄푸치아통일왕국이 수립되었고, 9세기부터 앙코르왕국이 번영하였다.

1863년 프랑스보호령이 되었고, 1949년 프랑스연합에서 한정적으로 독립하였다. 현재 헹 삼린을 중심으로 하는 캄푸치아인민공화국과 3자연합의 민주캄푸치아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시아누크는 1941년 왕위를 계승, 19453월 독립을 선언하고 195311월에 완전독립을 얻었다.

그는 2년 후 퇴위, 인민사회주의공동체를 결성하여 수상이 되고 1960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1957년 영구중립법을 선포, 비동맹외교를 표방하였으며, 1965년부터 미국과 4년간 단교하였다. 19703월 론 놀 수상이 우익 쿠데타를 일으켜 외유중의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친미정권을 세웠다.

독재로 치달은 론 놀 대통령은 국명을 크메르공화국(Repubic of Khmer)으로 개칭, 반공친미정책을 펴서 베트남전을 크메르에 끌어들였다. 북경(北京)에 망명한 시아누크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공산혁명조직 크메르 루지는 론 놀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1975417일 크메르 루지군은 프놈펜공략에 성공하여 론 놀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졌다. 캄푸치아를 적화한 크메르 루지는 19761월 민주캄푸치아를 선언, 시아누크를 국가원수에 옹립하였다가 4월에 키우 삼판을 국가간부회의 의장에 앉혔다.

수상 폴 포트와 부수상 겸 외상 이엥 사리가 실권을 장악한 민주캄푸치아정권은 전국민의 노동제, 도시민의 농촌 강제이주, 통화폐지 등 급진정책을 쓰고 약 200만 명을 학살하는 공포정치를 폈다. 19755월부터 캄푸치아· 베트남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은 1977년 단교하고 대규모 군사충돌을 일으켰다.

197812월 캄푸치아구국민족전선(FUNSK)이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아 폴 포트 정권을 공격, 다음해 1월 수도를 장악하고서 헹 삼린이 이끄는 캄푸치아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9814월 총선거, 5월 제4회 인민혁명당대회를 거쳐 6월 국회소집으로 신헌법이 제정되고 국가평의회장과 서기장을 헹 삼린이 겸임하였다.

헹 삼린 정권은 19792월 베트남과 평화우호조약을, 19832월 베트남·라오스와 인도차이나 3국수뇌회담을 가지고 협력협정을 맺어 베트남의 준위성국 상태에 들어갔다. 소련과는 19827월 경제기술원조협정을 맺었다.

북경과 평양을 오가며 망명정권을 이끌던 시아누크, 타이국경지대에서 게릴라항전을 펴고 있는 폴 포트파의 키우 삼판 수상,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을 이끄는 손 산 의장은 19819월 첫 3자회담을 열었다.

그 결과 198279일 민주연합정부(민주캄푸치아)의 성립을 선언하고 대통령 시아누크, 부통령 키우 삼판, 수상 손 산의 최고지도부를 구성하였다.

그 해 1025일 유엔총회는 캄푸치아대표권 표결에서 지지 90, 반대 29, 기권 26표로서 민주캄푸치아에 연속 4년째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1991파리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13년간의 내전이 종식되었으며, 1992년 설치된 UN캄보디아 과도 행정기구(UNTAC)의 감독하에 1993년 총선이 실시되어, 입헌군주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새로운 캄보디아 정부가 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쌀과 고무의 농업국, 장기내전으로 경제가 핍박하여 외화수입책으로 캄보디아는 198211월에 앙코르와트사원의 관광을 재개하였다. 19803월 통화제도를 부활하였으며, 화폐단위는 리엘(riel)이다.

2015년 기준 국민총생산은 168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080 달러이다. 2015년 기준 무역량은 수출 77억 달러(천연고무··후추·목재), 수입 104억 달러(원유·기계류)이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 나라는 시아누크시대인 19627월 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23개월 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북한권투선수 망명거부사건으로 주프놈펜총영사관을 폐쇄하였다.

론 놀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국은 197085일 수교합의하였다. 그러나 19754월크메르 루지의 프놈펜장악으로 단교하였다가 199710월 다시 국교를 재개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캄보디아 수출액은 65000만 달러고 직물, 수송기계, 농산물 등이 주종목이고, 수입액은 19000만 달러고 섬유, 임산물, 비철금속제품 등이 주종목이다.

한편, 북한은 19641228일 수교합의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캄보디아 씨엘립공항 출발 20:31

씨엘립 공항도 규모가 아주 작지는 않다. 여러대의 비행기가 늘어서 있고 밤에 보는 모습은 꽤 청결해 보인다. 가로등불빛에 맴도는 불나방은 꽤 많이 보인다. 공항에서 식당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약 10분으로 예전에 보던 모습과는 아주 상이하다. 그간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건물들 거리의 모습이 많이 발전된 모습이다. 공항에서 만난 캄보디아 가이드는 진시몬 부장이라고 하는 분으로 작은 체구에 말이 빠른 분으로 캄보디아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다.

 

시엠레아프(Siem Reap)

현재 인구 30만명으로 캄보디아 4번째 도시다. 앙코르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관광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캄보디아 경제의 60%를 차지한다고 한다.

프놈펜 북서쪽 약 300km 떨어진 시엠레아프강의 우안에 위치한다. 앙코르 시대에 축조된 제방 도로상에 도시가 있으며, 크메르 왕국 멸망 후에는 타이령()이 되었으나, 프랑스령시대에 타이로부터 할양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앙코르와트에서 4km쯤 떨어져 있어 앙코르와트의 현관구실을 하므로 관광호텔 등이 있다.

시엠레아프강은 프놈쿨렌 고지를 흘러 앙코르와트의 동쪽을 남류하여 톤레삽호()로 흘러든다. 915세기에는 크메르 왕국의 중심지로 번영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관개시설에 의한 미작지대의 중심지이다. 타이로 통하는 도로가 이어진다.

 

씨엘립 식당(KOBE) 20:40 ~21:36

식당은 고베일식이라고 하는 음식으로 철판구이다. 생선살, 오징어류, 야채류, 나중에는 비빔밥으로 마무리 하고 후식으로 과일이 나오며 끝이다. 맛은 보통이다. 음식이 예전에 왔을 때만은 못한 것 같다.

 

호텔도착(Empress Angkor Hotel) 21:40

호텔입구에 팜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커다란 뱀이 양쪽으로 지키고 있는 문을 통과여 들어가면 커다란 천장등이 내부를 훤히 밝히고 있다. 압살라 춤을 추는 여인들의 모습이 벽면을 장식하고 중앙에는 코끼리가 한 마리 놓여 있다. 우리는 모두가 3층에 있는 방을 배정받아 장시간을 이동한 후 휴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몇몇은 호텔 안 수영장에 나와서 간단히 소주로 입가심을 한후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캄보디아는 예전부터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건물의 하중을 줄이기 위하여 벽체를 얇게 하고 층간 높이도 낮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 호텔도 벽체가 얇아서 인지 소음이 많이 들린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가이드가 준비하여 나누어준 망고맛이 기가 막히게 좋다.

 

2일차

122일 수요일 맑음

기상 06:00

어제 늦게 도착하여 기상 시간을 조금 늦추어서 06시에 한다.

 

식사 07:00~07:30

아침 식단은 다양한 빵종류와 야채류, 따끈한 음식류, 여기에 오이무침, 김치도 보인다. 단연 인기 있는 음식은 월남쌀국수다. 또한 금시 해주는 오믈라이스, 계란 후라이는 어디를 가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후식으로 용과, 망고, 파인애플, 바나나가 맛있다.

 

호텔출발 07:35

오늘 캄보디아에서 가장 유명한 앙코르톰, 따프롬 사원, 앙코스왓을 구경하기로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이로 꼽히는 건물들로 그 규모면에서나 사원 벽면에 새겨진 작품은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경이로움이다.

호텔을 출발하여 약 20여분 후 앙코르 유적지 매표소에 도착을 한다.

여기서 입장권을 끊을 때 카메라로 촬영을 하여 사진을 담아주고 가는 곳곳마다 입장권 대조를 한다고 한다.

 

매표소 출발 08:10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받아 들고 톡톡 이를 타고 앙코르 톰으로 향한다. 톡톡 이는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2명씩 탈수 있는 이동수단이다. 예전에는 소형버스는 앙코르 톰으로 입장이 가능했으나 현재는 들어갈 수 없도록 한 것 같다.

매표소를 출발하여 25분후 앙코르 톰 남문에 도착을 한다. 톡톡 이를 타고 가는 길에는 오토바이와 다른 차량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황토흙이 흩날려 마스크를 쓰고가야 할 정도로 매쾌하다.

 

앙코르 톰 남문 도착 08:35

앙코르 톰 남문에는 한쪽에 54개 양쪽에 108개로 구성된 각양각색의 형상을 한 석상은 대부분이 목이 떨어져 나갔으며 깨끗하게 보이는 석상의 얼굴은 최근 복원한것이라고 한다. 석상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 나가는 7개의 머리를 한 뱀이라고 한다.

물의 수호신 나가

아코르 와트 유적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힌두교의 신은 뭐니 해도 나가와 압살라다. 나가신은 흰두교에서 창조의 신인 브라흐만의 손녀 카드루가 낳은 영물로서 얼굴은 신(인간), 일곱 개의 목은 넓직한 타원형의 킹 코브라의 모습을 형상화 했고 뱀의 꼬리를 가진 특이한 모습의 신이다.

주로 수중 궁전에 기거하는 낙천적이고 동정심 많은 영물이라 힌두교에서는 물의 수호신으로 섬겨 연못, 호수등과 연결된 다리, 난간, 벽 등에다 수호신의 의미로 즐겨 조각하거나 부조를 새겨 넣는다. 이는 다리의 난간에 나가를 새겨 놓으면 그 다리는 파괴와 훼손이 방지된자는 믿음인데 워낙 이 믿음이 깊은 나머지 앙코르 톰과 바이욘 사원은 불교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나가신을 새겨 놓았다. 나가는 영생약을 얻기 위한 사투를 벌인 젖의 바다 휘감기에서 만다라산을 묶어 젖의 바다를 휘저어 감로수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앙코르 톰

앙코르는 왕도(王都), 톰은 큰[]이라는 뜻을 나타내므로 앙코르 톰은 '대왕도'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유구(遺構)는 자야바르만 7세가 왕국의 수도로서 1200년경에 조영(造營)한 것이다. 13km인 성벽의 정사각형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중앙에는 세계의 중심으로 보이게 한 바이욘묘()가 높이 솟고, 그 동서남북으로 2추축대로(樞軸大路)가 도시를 4분하며 2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곳에 왕도의 문이 4, 왕궁에서 동으로 뻗은 대로 위에 1,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5개의 문은 앞면에 돌의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상(巨人像)의 열()을 난간으로 한 육교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바이욘묘는, 그보다 반세기 정도 앞서 세워진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룬다.

 

앙코르톰은 약 3Km x 3Km의 벽을 가진 도시다. 5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동서남북 문 + 빅토리 게이트(승리의문)

그때 당시 약 70만 이상이 살고 있었다라고 추정한다

거의 가운데에 바이욘 사원이 있다.

처음에는 힌두사원으로 지어졌으나... 자야바르만7세가 베트남 참파족을 물리치고 왕이 된 이후에 불교사원으로 증개축을 했다.

바푸온 사원 - 정면에서 보면 그냥 피라미드형 사원이고 뒤쪽에는 와불이 모양이다.

피멘나까스 - 우리나라의 웅녀 이야기 같은.. 캄보디아가 생겨난 전설이 있는 사원이다.

피멘나까스 서쪽에 왕궁터로 터만 남아 있다.

코끼리테라스 - 벽면에 코끼리가 세겨져 있다.

천상과 지옥 테라스 - 외벽은 천상... 노출되어 있어서 부조가 희미하다.

- 내벽은 지옥... 외벽에 비해 노출이 안 되어서 부조가 선명하다.

문둥왕 테라스(리퍼킹 테라스) - 문둥왕 전설.. 하지만 어느 왕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원본은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있다.

 

앙코르 톰(Angkor Thom, Jayavarman , 1181-1219 )

앙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앙코르와트라면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바로 앙코르톰이다.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톰은 거대함을 나타내므로 이는 곧 큰 왕성함을 의미한다. 앙코르톰은 앙코르 왕조에서 가장 융성했던 자이야와르만 7세 때 세운 것이다.

 

앙코르톰은 각 면은 3km의 길이와 약 8m 의 높이로, 자이야와르만 7세의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것은 방어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 벽들의 꼭대기와 각 코너들(작은 사원들로 되어있다.)을 따라서 이어져 있다,

 

각각 통치자를 숭배하는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 100m 넓이의 못은 외벽을 에워싸고 있고, 둑을 통한 오직 5개의 장소에서만 교차할 수 있었다. 각각 54개의 거인석상들이 정렬되어있다, 자비로운 얼굴들은 왼쪽을 따라 있고, 차갑고 무시무시한 얼굴들은 오른쪽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 거인석상들 수많은 나가(Naga)의 머리를 아치형태를 보여주며, 방문객을 받아들이고 있다. 거인석상들은 우유바다 휘젓기(천지창조)에 포함되었다고 추측 되기도 했었다. 도시 전체의 규모로 착안해보면, 거인석상과 나가(Naga)가 단순하게 시의 수호자라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또한, 입구의 얼굴들은 주요 포인트의 수호자, 왕들이라고 밝혀진바 있다, 도시를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다.

 

앙코르톰은 이렇게 둘레는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중심에는 바이욘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에서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도로가 도시를 넷으로 나눈다. 왕도의 문은 두 도로가 성벽과 교차되는 곳에 4, 왕궁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은 대로상에 1개 등 모두 5개가 있다. 5개의 문 앞에는 돌로 만든 큰 뱀을 껴안고 있는 거인상들이 있으며, 문은 4면에 얼굴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탑문이다.

 

이렇듯 크메르 민족의 국가적 힘을 과시하는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며 최초로 대승불교를 들여와 스스로를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Avalokiteshvara)이라 생각하며 왕조의 종교적, 정치적 이념을 마련했던 자이야와르만7(통치;1181~1201)가 건설한 앙코르 제국의 마지막 수도이다. 1177년 참파왕국의 침입으로 수도가 무너진 후 수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건축한 앙코르 톰은 한 변이 3km에 라테라이트(홍토석)로 높이 8m의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바깥쪽에는 수로를 파서 이중의 방어벽을 만든 거대한 성곽도시로 내부 넓이는 442천 평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바이욘사원 그리고 바푸온 사원, 왕궁, 코끼리 테라스, 문둥이왕의 테라스, 피메아나카스 등 많은 유적이 모여 있다.

 

앙코르 톰은 바이욘 사원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큰 도로가 있으며 성문은 모두 5개로 동쪽에만 승리의 문이 하나 더 있다. 승리의 문은 700km 떨어진 참파로 향하는 출발점이며 과거 의 패전에 대한 설욕과 영토확장에 대한 집념의 상징이기도하다.

 

입구에서 성문으로 이어지는 돌다리 양쪽 난간에는 7개의 머리가 달린 나가(Naga, 뱀신)가 서 있고, 난간의 좌측에 54개의 신과 우측에 54개의 아수라 석상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이 조각의 주제는 힌두교의 신화에 나오며, 앙코르왓의 유명한 부조 중 하나인 우유바다 젓기(Churning of the Ocean Milk)에서 따온 것으로 신과 아수라들이 영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바수키뱀을 축으로 우유바다를 휘젓는 장면이다.

 

원나라의 사신 주달관이 13세기에 앙코르 톰의 웅장함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인 바이욘이 우뚝 서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들과 수백 개의 돌로 만든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두 마리의 황금사자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는 황금 다리가 동쪽으로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여덟 개의 황금 부처가 돌로 된 방을 따라 늘어서 있다. 청동으로 된 황금 탑(바푸온)의 북쪽에는 바이욘보다 더 높을지도 모르는, 밑에 10개가 넘는 방이 있는 탑(피메아나카스)이 있다. 이 탑의 북쪽1/4리쯤에 왕이 기거하는 왕궁이 있다. 왕실 위에는 또 다른 황금탑이 있으며 이 탑들을 보고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앙코르제국이라며 감탄하였다. 성문의 앞에는 돌로 만든 큰 뱀을 껴안고 있는 거인상들이 있으며, 문은 4면에 얼굴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탑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웅장하고 위대한 건축을 이루었던 앙코르 제국도 15세기가 되면서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춘다. 몇 차례 앙코르 제국의 위업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자이야와르만 7세 이후로는 다시 그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앙코르의 역사와 함께 묻혀버린다.

 

남대문

앙코르 톰은 한 변이 3킬로미터, 높이 8미터의 라테라이트로 성벽을 쌓은 성곽도시로 그 넓이는 9만평방 km에 이른다. 이 넓은 지역의 한 가운데에 바이욘 사원이 위치해 있고 초기의 앙코르 유적인 바푸온 사원, 왕궁과 코기리 테라스, 나왕(癩王)의 테라스, 텝 프라남, 프리아 파릴라이, 피투 크리앙과 같은 수많은 유적이 모여 있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 성곽도시를 뜻하는 나가라(nagara)nokor - ongkor - angkor의 음운탈락 과정을 거쳐 크메르화된 도시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며, (thom)은 형용사 커다란뜻을 가지므로 앙코르 톰은 대도시국가의 의미가 된다.

 

앙코르 톰의 성벽에는 다섯개의 성문이 있다. 바이욘 사원을 축으로 동서남북에 네개의 성문, 즉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이 나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남대문이 바로 앙코르톰의 정문이며 동대문은 사자(死者)의 문으로 불린다. 여기에 추가하여 왕궁 앞 광장에서 동쪽을 향해 승리의 문이 하나 더 있다. 승리의 문은 영원한 숙적이었던 태국을 향해 있는데 자야바르만 7세의 영토확장과 과거 앙코르 와트의 함락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깔려 있는 곳이다.

 

성문은 높이가 20미터로 사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 꼭대기에는 약 3미터에 달하는 사면불(四面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관세음보살상을 상징한다. 성문의 크기는 당시 왕과 장군들이 코끼리를 타고 드나들 정도의 크기로 거대하다.

 

또 성문 주위에는 연못을 파서 요새화한 흔적이 있으며, 남대문(南大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 난간에는 좌우로 54개의 석상(石像)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조각은 앙코르 와트 제1회랑에 부조된 것처럼 힌두교 신화인 신과 악마들이 장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바수키 뱀의 꼬리를 축으로 우유바다를 휘젓는 장면을 상징한다.

 

입구에서 성문으로 이어지는 돌다리 양쪽 난간에는 7개의 머리가 달린 나가(Naga, 뱀신)가 서 있고, 난간의 좌측에 54개의 신과 우측에 54개의 아수라 석상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이 조각의 주제는 힌두교의 신화에 나오며, 앙코르왓의 유명한 부조 중 하나인 우유바다 젓기(Churning of the Ocean Milk)에서 따온 것으로 신과 아수라들이 영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와수키뱀을 축으로 우유바다를 휘젓는 장면이다.

 

또한 성문(Gopura, 고뿌라)은 높이 23m의 돌출받침형(corbel) 아치 형태로 꼭대기에는 동서남북 4방향으로 4면불 형태의 관세음보살(bodhisattva Avalokiteshvara)의 얼굴이며 동시에 자이야와르만 7세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4면의 보살상은 독특한 모습에 부드러우며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성문의 아래쪽은 코끼리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인드라(Indra)신이 동료들과 함께 코끼리의 중앙에 앉아있다.

 

 

제국의 영화와 종말의 역사 앙코르 톰

앙코르와트 사원을 건축한 수르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었다면 거대한 도읍지 앙코르 톰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사촌이었던 그는 1177년 챰족의 침입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고 챰국을 정벌한 영웅으로 칭송받아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이곳 앙코르 톰에 수도를 마련하고 앙코르 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앙코르 제국의 전성기 때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에는 동···북문과 동쪽에 승리의문 등 총 다섯 개의 성문이 있고 문을 통과하면 정중앙에 앙코르와트사원과는 느낌이 다른 새로운 사원, 바이욘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지금 내가 멈춘 곳은 주로 관광객들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남문이다.

 

여행객을 모두 남문 밖으로 내려놓은 버스는 여행객은 내버려둔 채 저 혼자 거의 백미러가 닿을락 말락한 폭의 남문을 마치 곡예를 하듯 지나간다. 그 모습이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지만 그나마 이렇게 곡예를 할 수 있는 버스로는 한국산 아시아 중고버스가 유일하다고 하니 앙코르 톰의 남문이야말로 한국산 중고버스를 진면목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는 현장이 아닌가?

 

아슬아슬한 버스의 곡예쇼를 본 사람들의 눈이 그다음에 머무는 곳은 바로 일곱 개의 머리를 한 커다란 나가상을 필두로 왼쪽과 오른쪽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54개의 선신과 악신상인데 이 거인상은 바로 힌두신화 중에서 힌두의 신들이 어떻게 영생의 삶을 얻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유해교반(젖의 바다 휘젓기)을 묘사한 조각들이다.

 

힌두신들은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달리 저주로 인해 처음부터 영생불멸의 삶을 얻지 못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러던 힌두신들이 그들에게 영생불멸의 삶을 가져다 줄 암리타(감로수)를 얻겠다는 무서운 일념 하나로 서로 못마땅해 하던 악의 신과 손을 잡고 나가(바슈키)로 만다라 산을 묶어 1000년 동안 내내 생명의 원천인 젖의 바다를 합심해서 휘젓게 된다. 적과의 동침이라고나 할까?

 

선신과 악마와의 불완전한 동거는 결국 천신만고 끝에 불로장생의 물 암리타(감로수)를 탄생시켰지만, 악마가 암리타를 몰래 훔치면서 불안정했던 선신과 악마의 동거는 깨지고 암리타를 둘러싼 선신과 악신과의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생의 욕망과 감로수 그리고 신과 악마의 끝없는 싸움, 그러고 보면 힌두교의 신들은 매우 인간적인 것 같다. 뿌리는 하나이나 몸체가 다른 선과 악에 대한 절묘한 묘사가 양쪽에 서있는 돌 거인의 하나하나의 모습에 투영되고 있었다.

선신의 조각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지만 악마의 조각은 눈 코 입 모두가 부리부리해서 척 봐도 성질 사나워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금방 구별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다. 특이할 만한 것은 53개의 선신과 악신상의 모습 중에 같은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모두 어딘가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신의 모습은 고수머리며 늘어진 귀, 엷은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불상과 닮아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앙코르 톰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을 비쉬누신의 화신으로 여겼던 사촌인 수르야바르만 2세와는 달리 힌두교도가 아닌 불교도였기 때문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당시 퍼지고 있었던 대승불교를 들어와 국교로 삼고 자신을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칭했던 자이다.

 

따라서 앙코르 톰과 톰 내의 바이욘 사원 또한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 그렇다면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이곳에 대문부터 대표적인 힌두교 설화로 장식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아직까지도 크메르인의 의식 속에 관습적으로 존재하고 힌두신앙 때문일 것이다. 다리 위에 나가의 신상을 조각하면 물의 수호신 '나가'가 다리를 보호해준다는 그 속설들이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 박혀져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나가를 해자의 맨 처음에 내세운 덕분인지 1,2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앙코르톰의 완벽한 모습을 마주하고 서있을 수 있다.

 

앙코르 톰의 건축기법에 관해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바로 이미 있는 그대로의 돌덩어리를 이용해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건축법이라고 할 수 있다. 퍼즐처럼 각각 일부분이 조각된 돌덩이 하나하나씩을 돌덩이에 뚫려있는 두 개의 구멍과 밧줄을 이용하여 적정한 자릴 찾아 쌓아올렸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멋진 조각으로 탄생되는 요술과 같은 건축기술은 지금 봐도 여전히 신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앙코르 제국의 화려한 역사는 이 앙코르 톰 시대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지나친 건물축조로 인한 국가 재정의 탕진, 더더구나 자신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칭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자야바르만 7세에게 천형처럼 다가온 문둥병 또한 이 왕궁의 슬픈 결말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23m 높이의 성문벽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성문 벽에 새겨져 있는 코가 셋 달린 코끼리 아이바라타를 타고 벼락을 쏘는 바즈라유다를 든 힌두교에서 번개의 신 인드라 조각의 배웅을 받으며 바이욘의 미소가 아름다운 바이욘 사원으로 출발했다.

오마이뉴스 김정은 기자가 2005년에 입력한 자료임

 

바이욘 사원 09:05 ~09:47

우리는 남문의 아름다운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마친후 다시 톡톡 이를 타고 안으로 입장을 한다. 남문을 지키고 있는 고프라를 통과한다.

고프라는 성곽을 두르는 담벽의 입구에 탑을 세워 장식한 것으로, 앙코르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이다.

톡톡 이를 타고 1.5KM거리의 바욘사원앞에 내린다.

바욘사원은 12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 졌으며 야바르만 7세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다. 불교양식바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있으며 앙코르 지역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원 중에 하나 이다. 54개의 탑(현재는 36개만 남아 있다고 함)에 앞 뒤 양 옆 사면에 새겨진 큰 얼굴 200여 개가 미소를 띄고 있는 곳이다. 지긋이 내려 감은 눈, 순박해 보이는 두툼한 입술의 그 얼굴들은 부처의 얼굴이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알려져 있다. 바욘 사원의 회랑 부조에는 당시의 건설 장면이 잘 새겨져 있다. 건물의 기초와 모래를 다져 기초를 만드는 장면, 돌을 나르고 쌓아 올리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사암으로 된 돌을 서로 갈아서 빈틈이 없이 쌓은 것이 특색이다.

우리가이는 연신 바욘사원에 대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좌측으로 성벽 부조에 새겨진 원나라사신과 크메르인들이 행령을 하는 장면등 설명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 2층 까지 둘러본후 우측으로 나온다. 앙코르 와트는 65M, 바이욘사원은 45M로 씨엘립에서는 이 높이를 넘겨서 건축물을 지을 수 없다고 한다.

 

바푸온 사원

바이욘 사원의 북쪽에 근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앙코르에 있는 가장 인상 깊은 유적 중 하나이다. 앙코르 유적지중 가장 독특한 건축 디자인으로 앙코르에서는 처음으로 여러 형태의 둥근아치 모양으로 둘러싼 갤러리들은 사암으로 만들어 졌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1번째, 3번째, 5번째 층위에 만들어 졌다. 거인석상은 16세기경에 만들어진 서쪽 외관의 부처에 기대어진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앙코르 왓, 프놈바콩과 더불어 앙코르 시대를 대표하는 사원이다.

 

바푸온은 앙코르 지역에서 3번째로 건립된 유서깊은 사원으로 앙코르톰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다야디뜨와르만 2세에 의해 1060년에 완공된 바푸온은 힌두교의 시바신에게 바쳐진 웅장한 성소였으며 훗날 자이야와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할 때 바푸온을 경내에 넣었다.

 

현재 이 사원은 복구중이여서 내부는 입장 금지이다. 오래전에 프랑스발굴팀(EFEO)에 의해 복구공사를 하던 중 크메르 루즈 시절인 1972년 국내 사정에 의해 무기한 연기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대대적인 복구에 임하고 있다. 원래 2004년에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2006년인 지금까지도 복구중이다. 완전히 복구를 마치려면 몇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사원 중앙 뾰족하게 솟은 원형 사원은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거주하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메루산을 의미한다. 메루산은 힌두교의 시바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바푸온은 메루산의 주인인 시바신에게 바쳐졌다. 또 메루산은 불교에선 우주 중심에 선 수미산(須彌山)으로 불리운다. 때문에 바푸온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바푸온 외곽 벽의 둘레는 425m x 125m에 달하며 모든 것은 메루산으로 향한다.

 

1m 폭도 안되는 짧은 다리를 거쳐 바푸온에 들어서면 바푸온 사원 중앙에 위치한 원형탑과 기단 메루산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거주하는 4개의 대륙 중앙에 위치한다. 원형탑(메루산)5단짜리 4각형 기단(基段) 위에 얹혀진 모습을 취한다. 각 방향으로 4군데의 현관이 나 있으며 각 방향으로 난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내부는 맨아랫단부터 3단까지는 단을 빙 둘러 복도로 이뤄진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22대 왕, 자이야와르만 7(Jayavarman , 11811219)

수리야와르만 2세의 죽음 후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시암족과 참파국이 침입하고 참족의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이들을 물리치고 격퇴한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자이야와르만 7세다. 그는 톤레삽 해전에서 참족을 모두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는데 이 장면이 바이욘 사원의 벽면에 생생하게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자이야와르만 7세는 자신을 살아있는 부처로 행세하였다. 1186년에는 타 프롬 사원 비문에 어머니를 부처의 어머니’(프라즈나파라미타)로 기록하였고, 자신은 1191년 프레아 칸 사원 비문에 자야붓다마하나타로 기록해 놓았다. ‘자야는 자이야와르만 7세를 지칭하며, ‘마하나타는 위대한 현자를 뜻한다.

 

그는 참파왕국의 침입으로 국가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참파군을 몰아내고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쌓은 다음 바이욘 사원을 건축하는 등 국가혁신을 꾀하면서 국가개조의 이념으로 대승불교를 선택하고 자신을 어려운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자이야와르만 7세는 이렇듯 캄보디아 역사에서 영웅이며 부처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이욘 사원이 있는 거대한 앙코르 톰의 건설과 주위에 타 프롬, 프레아 칸 등 불교사원을 건립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수많은 병원을 전국에 건립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베트남의 해안에서부터 말레이시아 반도와 멀리 미얀마까지 최대의 영토를 구축하여 앙코르 왕조 최후의 번성기를 누렸다. 자이야와르만 7세 이후 크메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 이후 크메르 왕조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며 1431년 마침내 서쪽 태국의 아유타야 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고 만다.

 

 

코끼리 테라스(Terrace of the Elephants, Jayavarman , 12세기 말-13세기 초)

앙코르 톰의 또다른 볼거리는 코끼리 테라스 인데,코끼리 테라스는 길이가 300미터나 된다.

코끼리테라스는 캄보디아 앙코르톰이라는 성벽도시의 한 부분으로 왕궁 앞에 있는 길이 300미터, 15미터의 코끼리신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테라스에는 코끼리와 가루다의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테라스의 중앙에는 황실코끼리가 부조되어 있고, 양옆을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신화적 상상의 새인 가루다가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양옆에는 나가가 지키고 있고 문둥병왕의 테라스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룬다.

 

왕궁의 정문인 동쪽 입구에 약 350m길이로 이어지는 단상으로 왕이 공공행사나 군인들의 사열을 관장하던 곳이다. 동쪽 광장을 향하고 있는 단상은 3개인데 양 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쪽의 단상은 가루다가 받치고 있다. 중앙의 것은 왕이, 양옆의 것은 신하들이 사용하던 것 같다. 단상 위에는 나무로 된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아래 중앙광장에서 장대한 병사들의 분열과 코끼리 퍼레이드 등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 같고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다. 광장 앞쪽 끝에는 12개의 탑(12 Prasate Sour Prat)이 열병하듯이 서 있어 위용을 더하고 있는데 파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들 위에는 끄레응(The Kleangs)이라는 건물들이 있는데 이는 창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는 외국에서 온 사실들을 접대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코르톰의 왕궁 정원을 마주보고 왕궁 광장 앞에 있는 코끼리 테라스는 원래 왕궁 터였지만 왕궁이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곳에서 자이야와르만 7세는 군사행진을 했었고 각종 행사도 주관하 였다. 코끼리 테라스에는 왕궁을 증축했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왕궁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건설 되었다. 코끼리 테라스는 그 길이가 300m이며 테라스의 중앙에는 황실코끼리가 부조되어 있고, 양옆에는 가루다가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남쪽의 계단에는 머리 셋 달린 실물 크기의 코끼리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각 단의 벽에는 사자와 가루다의 조각이 있다. 특히 실물 크기의 코끼리 옆모습 부조는 호랑이가 코끼리를 할퀴고 있는 동안 코끼리는 코로 호랑이를 사냥하며 싸우고 있다. 이 곳의 난간은 나가가 둘러싸고 있으며 테라스 위에는 두개의 층이 있는데 하나는 사각형이고, 다른 하나는 기초에 신성한 거위가 새겨진 단으로 되어 있다. 이 단 위에는 원래 금박을 입힌 목조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주도로에서 갈라지는 보도 앞 계단에는 내부 벽이 있고, 그 벽의 기초 부분에는 '머리 다섯 달린 말' 의 조각이 있는데 매우 생동감이 있으며, 조각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말 위에 층층으로 된 겹 양산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왕의 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은 압사라들과 무서운 모양의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악마들은 몽둥이를 들고 겁먹은 인간을 쫓고 있다.

*우리는 코끼리 테라스는 톡톡 이를 타고 지나는 길에 볼수 있었지만 시간이 없는지 그냥지나친다.

 

문둥이왕의 테라스

(Terrace of the Leper King, Jayavarman , 12세기 말-13세기 초)

코끼리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이 테라스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외벽과 나란히 내부에 겹으로 벽이 있다. 프랑스가 이곳을 보수하면서 바깥벽과 비슷한 구조의 부조가 된 두 번째 벽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 두 번째 벽이 건축 설계를 변경하여 축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지상의 메루산과 똑같은 지하의 메루산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곳에는 문둥이 왕(Leper King)1m 높이의 독특한 좌상이 있는데 실물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있으며 이것은 복사된 것이다. 이 조각상은 누드이며 남성 심벌이 없다. 조각의 주인이 문둥이 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학자들에 따라 힌두교의 신인 쉬와, 쿠베라(불교미술에 나타나는 약샤), 야마(염라대왕)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문둥이 왕의 테라스는 높이 6미터× 길이 25미터의 규모로 라테라이트와 사암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테라스 남동쪽에는 통로가 있고 이 곳에 라테라이트로 쌓아올린 계단에 힌두교의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다.

 

이 문둥이 왕 좌상이 옷을 걸치지 않은 채 조각되어 있는데 이 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에이모니에는 자야바르만 1세의 상이라고 하나, 야소와르만 1세의 상이라고도 하고 시바신상 혹은 염라대왕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밖에 프랑스의 한 학자는 이 문둥이 왕 테라스에 왕들의 전용 화장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 조각은 바로 야마를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을 제시했다.

 

캄보디아의 전설 중에는 왕 앞에 엎드리기를 거절한 한 신하를 왕이 칼로 베었는데, 그 때 그의 침이 왕에게 튀어 왕이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자이야와르만 7세가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에 많은 병원을 짓게 되었다고 하지만, 왕이 문둥병자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피메아나카스

피메아나카스는 앙코르 제국의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궁전과 맞붙어 왕이 수시로 드나드는 실제적인 왕궁 부속 사원이다. 따라서 여느 사원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으며 왕이 뱀 여인과 동침하는 비밀스런 궁전이여서 "하늘의 궁전(Aerial Palace)"라 불린다.

 

'황금탑'이란 이름도 갖고 있으며 중국 원나라 방문객으로 앙코르 톰에 거주했던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의 방문기에 의하면 3층의 성소 꼭대기는 황금으로 입혔다고 전해온다.

 

중국의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1296년 앙코르 왕조에 파견되어 1년동안 머물면서 현지인의 습속을 기록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따르면 앙코르톰 안의 피메아나카스 사원에 대한 뱀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천상의 궁전으로 불리는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는 궁중의 중심에 위치하여 붉은 색을 띈 라데라이트로 지어진 3층 건물로서 중후한 맛을 자아낸다. 주달관은 이 곳이 사원이 아니라 왕궁으로 적고 있으며, 뱀으로 변하는 왕의 설화를 전해준다.

 

밤이 되면 왕은 잠을 자기 위해 피메아나카스 탑의 꼭대기에 오르기 시작한다. 왕궁 전체가 잠에 빠져들 무렵이면 성스러운 뱀(naga)이 왕궁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하고 매일 밤 국왕과 지내다 아침이 되면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러다가 여인이 찾아오지 않는 밤이면 왕국 전체가 무서운 공포와 기근에 휩싸이고 결국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국왕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암시를 보낸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당시의 피메아나카스는 목조 건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무너져서 대다수가 없어지고 석조건물 몇 채만이 남아 있어 옛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후로 뱀신의 이야기는 동남아에서 함나의 신앙으로 자라잡고 있으며, 이 변형이 중국이나 극동에서 내려오는 용신(龍神)이야기가 된다.

 

피메아나카스 사원 건축의 시작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했으나, 대부분의 중요 시설물은 후대인 수르야와르만 1(Suryavarman I)가 완성했다. 이곳은 왕궁 내 사원이라 왕궁을 에워싼 성벽 내에 위치한다. 그중 동쪽만 이중 성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주 출입문도 동쪽에 위치한다.

 

건축의 재료로는 붉은색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건립한 피메아나카스는, 1층은 계단층으로 2층은 갤러리층으로 3층은 성소의 구조를 취하는데 그 층을 나눔에 있어서도 섬세한 배려와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구조에 1층에서 2층까지는 지상에서부터 정점을 향해 뽀족하게 3단으로 공간을 나누고, 3단의 사방 각 면 한가운데에 성소로 향하는 계단을 두고 각 계단은 1단마다 두 개의 난간의, 6단으로 장식하고 각 2단층마다 양쪽에 사자상으로 장식했다. 늠름한 사자상도 일부만 남아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화로 깍여져 나간 모습으로 있다.

 

왕궁

왕궁의 대다수를 이루었던 목조 건물은 현재 앙코르 유적지에서 사라졌다. 문둥이왕 테라스 뒤쪽에 위치한 왕궁은 원래 목조건물이었으나 왕궁으로 들어가는 석조 입구만이 남아있다. 왕궁 동쪽문은 고뿌라 문으로 문틀 위에는 깔라(Kala)의 귀면상(鬼面像)이 있는데 힌두교에 의하면 항상 굶주린 깔라는 쉬와 신에게 먹이를 달라고 보챘는데 쉬와가 네 몸을 먹으라 하여 자신의 몸을 죄다 뜯어 먹고 머리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쉬와가 자신의 말을 잘들은 깔라의 머리를 사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아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이 왕궁 문틀에는 왕에 대한 충성맹세가 새겨져 있다.

 

왕궁 건물 또한 단단한 라테라이트와 사암 등 석재로 지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만 그런 위대한 건물을 짓던 왕의 거주지는 흔적이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목조왕궁 건물이 대부분이라 세월의 오랜 흐름에 따라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을 떠받혔을 기단(基段)이 지금 테라스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렇듯 앙코르의 석조건축은 목조건축 기술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석조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기둥과 들보를 이용한 출입부분의 장식, 사암으로 만든 기와지붕 형태의 조형에서 목조건축의 흔적을 찾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왕궁이 목조로 이루어졌고, 대다수의 사원건축물에서 목조건축 기술의 원형을 쉽게 알 수 있다.

 

석조건물에서 기둥과 들보를 이용한 출입부의 보강, 사암을 사용한 기와지붕은 목조건축에서 발전된 것이며 건물을 오래 보존하려는 필요성에 의하여 건축을 짓는 방식도 끼워 맞추는 방식에서 석재를 쌓아 올리는 적조(積組)방식으로 발전하였고, 내구성이 강한 재료를 추구하면서 건축재료는 목조에서 연와, 라테라이트와 같은 석조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앙코르 톰에는 볼거리가 많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남문과 바욘사원을 둘러본후 한쪽 편에 있는 휴식처로 이동하여 야자수(코코넛) 2인당 하나씩 사서 시원하게 마시고 다음 관람지로 이동을 한다.

 

따프롬 사원 10:47 ~11:30

쉼터에서 야자수를 마시고 톡톡 이를 타고 도착한 곳은 따프롬 사원으로 오래전 왔을 때 뻥 뚫린 방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나왔던 그 사원인대 현재는 이곳을 구석구석 개방하여 한 바퀴 돌아나오는 대 대략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걷기 힘든 우리 어머님은 얼마 전 다녀간 막내가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가이드를 따라 안으로 입장을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지레로 한순간에 장애인이 된 분들로 구성된 악단이 한국인이 지나가면 귀신같이 아리랑을 연주 합니다. 이 순간 우리들은 몇 달러씩 이들에게 투척을 합니다. 이후 더 들어가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흙단목이 나옵니다. 단단하기가 최고 이며 가장 귀하다는 나무입니다. 이후 우리는 나무뿌리로 부서져 가는 따르롬 사원을 좌측으로 돌아서 뒤편으로 돌아들어갑니다. 이곳저곳 자연의 힘에 무너져 가는 사원의 이곳저곳을 돌아서 나옵니다.

 

따프롬 사원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의미의 따프롬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만들기 전, 어머니의 극랑왕생을 빌기 위해 12세기에 건립한 불교 사원이라고 한다.

18506월 프랑스 뷰오신부가 캄보디아에서 본국에 전령을 보냈다. 캄보디아 톤레삽호수 근처에서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소식을 무시해 버립니다.

캄보디아 같이 작은 나라에서 배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사원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뷰오신부가 미쳤다고 했으며 열병에 걸려 헛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줬다고 합니다. 뷰오 신부는 몇 해 뒤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그의 말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1년이다. 프랑스 학자 앙리무어가 캄보디아의 밀림을 탐험다가 우연히 거대한 성곽을 발견했다. 문 앞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알 듯 말듯한 신비로운 비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들이 보였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그 규모다. 사원너머에 사원이 있고, 여기저기 사원이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원이 수백년 동안 감쪽같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누가 이런 사원을 만들었을까? 하려하고 정교한 벽화는 누가 언제 왜 그린 것인가?

앙코르 와트를 꼼꼼하게 눈여겨 본 앙리무어는 프랑스에 돌아와 탐험기를 책으로 냈다.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서구의 고고하계는 발칵 뒤집혔다.

앙코르톰의 동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는 따프롬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에서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뱌욘 양식으로 크게 지어졌으며 원래의 이름은 라야비하라 였다. 사원의 규모는 가로 600m, 세로 1,000m로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크다. 당시 이 사원을 관리하기 위해 2500명의 성직자와 12.000명의 하급 성직자가 관리할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폐허상태로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특히 커다란 나무 뿌리에 침식당하고 있는 모습은 신비스럽다. 무화과, 보리수등의 커다란 나무 뿌리가 벽과 지붕에 내려 앉고 담과 문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자연의 위용을 느낄수 있다.

이 사원에는 여성들이 좋아 하는 엄청난 양의 보석들이 이 방에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트리모양의 공백에는 황금불상이 벽면의 동그란 구멍마다 사파이어와 루비들이 알알하 들어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방 천장에 조그마한 구명이 있는데 그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게 되면 그 빛을 루비와 사파이어, 황금불상들이 반사를 해내어 이 방을 환상적으로 만들었을거라 합니다. 아쉽게도 태국인들이 죄다 빼갔을 거라 합니다.

현재는 이나무에 성장 억제제만 투여하고 더 이상의 폐허를 방지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자야바르 7세는 3개의 사원을 만들었는데 바욘사원, 어머니를 위한 따프롬 사원, 아버지를 위한 사원이 더 있었는데 나무들이 공격으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다.

 

수끼 식당 12:05 ~13:00

따프롬 사원을 둘러보고 툭툭 이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씨엘립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툭툭이와는 이별이다.

수끼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음식은 펄펄 끊는 물에 각종 야채를 넣고 건저 먹은 후 라면사리를 넣고 끊여서 먹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 음식으로 아줌니들은 좋아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식이 그리 썩 내키지는 않는다.

 

앙코르 와트 13:15 ~15:10

앙코르 와트[Angkor Wat]

앙코르 톰(Angkor Tom)의 남쪽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앙코르(Angkor)'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Wat)'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의 탑()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 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4m, 2회랑(115×100m)12m, 3회랑(60×60m)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 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1982년 집계를 보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옮김

 

점심식사를 한 후 대형버스로 이동을 한다. 버스에 승차하여 가이드는 캄보디아의 인구가 약1600만명으로 GNP 1400~1500달러로 한달 12~15만원을 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15분후 우리는 앙코르 와트와 가까운 곳에 내려서 예전에 건너던 해자의 다리는 공사 중으로 임시로 가설한 해자의 다리를 건너서 앙코르와트로 들어간다.

씨엘립이란 도시는 앙코르 제국의 수도 였으며 앙코르와트, 바이욘사원, 따프롬사원등 화려하고 규모가 큰 사원들이 대량으로 있는 곳이다. 앙코르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기반으로 지금의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아루느는 대제국이 였다. 그 당시 수도인 씨엠립의 인구가 100만으로 추정한다고하니 대단한 도시 였다. 전성기의 로마 인구도 100만이 안됐다고 하니 그규모를 아름 직작해 볼수 있다.

씨엠립이란 말의 의미는 태국인을 의미하는 씨암과 죽음을 의미하는 립의 합성어라고 하는데 이 뜻은 씨암족에 의해 멸망했다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고 씨암족을 죽이자라고도 해석을 한다고 한다. 태국과의 사이가 안 좋았다는 사실을 알수있다. 옆나라인 베트남과도 마찬가지이다. 씨암족에 멸망한후 약 400년 동안 정글에 묻혀 그 존재가 잊혀 졌다가 프랑스인 앙리무어에 의해 알려졌다. 400년간 죽의 땅이라 해서 현지인들은 그곳에 들어가는 금기시했으며 거의 잊혀 졌다고 한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해자를 건너 이승이 아닌 사후세계로 들어간다.

해자의 역할은 후에 가이드님이 설명을 했지만 가뭄때 앙코르와트의 건물이 가라앉는 것을 방지한다고 한다.

앙코르 유적중 유일하게 앙코르 와트만 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다고 한다. 서쪽은 힌두교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대 앙코르와트 사원은 죽음의 사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는 3층 구조로 되어있는데 1층은 짐승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신들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는 대는 37년이 걸렸다고 한다. 수리야 바르만 2세의 집권기가 37년과 일치한다고 한다. 흰두교에서는 왕은 신을 의미하며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왕을 위한 건물을 짖는다고 한다. 바이욘사원 같은 경우 사원을 짖다가 중간에 중단한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고 한다. 37년만에 건설한 건물이 정교하고 기둥하나에 새겨진 부조에는 베트남으로 전쟁을 출정하는 모습, 압살라의 모습등 대단함을 느낀다. 이렇게 지은 건물이 1000년의 세월에도 끄덕이 없는 것은 해자에 물을 가두어 침하를 방지하는 데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앙코르 와트 사원과 앙코르톰, 따프롬 사원들을 보며 고대 캄보디아인들의 대단함과 위대함을 엿볼수 있다.

앙코르와트 2층에서 3층으로 오는 계단은 경사도가 75도나 되는 가파른 계단이다. 예전에는 남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랐으나 현재는 동쪽에 목재 계단을 놓아서 예전보다는 수월하게 오를수 있다. 이렇게 경사가 가파른 이유는 인간이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데 건방지게 두발로 올라오게 할 수 없고 네발로 기어 올라오게끔 만든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앙코르 와트 사원까지 모두 관람을 마치고 이제 씨엘립 시내로 향한다.

 

매장 15:30 ~16:00

시내로 들어가면서 시간이 조금 남는다고 커피를 마실건가, 시장구경을 갈건가 선택을 했으나 시장구경가자는 쪽이 많아 시장으로 향했는데 결국 시장은 오래전 동남아 관광을 가면 들르던 그런 매장이다. 건강식품, , 악세사리등을 설명하고 판매를 하는 곳인데 별 반응이 없어 일찍 끝나고 나왔다.

 

식당(MALIS RESTAURANT) 16:11 ~17:15

인도풍이 나는 식당이다. 안쪽을 길쭉하게 마련한 식탁에 앉는다. 옆자리에는 여러명의 인도인들이 먼저 들어와 식사중이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고급요리인지는 몰라도 와인과 곁들여서 꽃, 야채를 머무린 요리와 국이 나오는 것으로 이것도 글씨 아줌니들 입맛에는 잘 맞는지는 몰라두 우리내 입맛에는 별루다. 혀튼 1시간 가량의 식사시간이 끝나고 이제 캄보디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출발을 한다.

 

씨엘립공항 도착 17:40

식당에서 출발하여 30여분 만에 골목을 여기저기 누비며 도착을 한다. 씨엘립공항은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비교적 깨끗해 보인다. 공항에 도착하여 일단 짐부터 부치고 출국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하여 입국장으로 들어간다.

입국장 6번 게이트에 도착하여 더러는 면세점을 전전하고 나머지는 텅빈 의자에 앉거나 눕거나 피로한 몸을 쉬게 한다. 이후 1시간가량이 지나 1920분 보딩후 비행기에 탑승하여 씨엘립공항을 2005분 출발하여 2015분 이륙하여 베트남 하노이로 향한다.

 

하노이 공항 도착 21:52

씨엘립공항에서 하노이 공항 까지는 대략 900KM가 된다. 비행시간 1시간 50분으로 시차는 없다. 하노이 공항에 2146분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출구로 나와 입국장 앞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기다려 오랜시간이 지난 후 입국장을 빠져나간다. 입국은 간단히 끝나지만 사람이 많아 시간이 다소 많이 걸렸다.

 

하노이 호텔 도착(Muong Thanh GRAND XA la Hotel) 0000

하노이 공항에서 입국수속 마치고 나오는 대 1시간 반가량이 걸려서 공항에서 1112분 출발하여 50여분이 조금 못 걸려서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백장미로 장식한 로비와 소형차가 한 대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모두는 8층과 9층에 방을 배정받아 오늘 먼 거리 이동하느라 고생한 몸을 쉬게 한다.

 

3일차

123일 목요일 날씨 흐리고 안개 짙음, 사파날씨는 맑음

 

베트남베트남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수도는 하노이이고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있으며,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331,210km2로 남한의 3.3배 크기이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길이는 1,650km에 이른다. 행정 구역은 5개의 중앙 직할시와 59개의 성으로 나뉘어 있다. 기본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공화제로, 공산당이 나라와 국회, 정부의 활동을 주도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주석은 임기 5년이며, 국회가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인구는 약 915만 명(2012년 기준)으로, 전 국민의 86%인 비엣족과 53개의 소수 민족, 100만여 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다.

공용어는 베트남어로, 발음의 길이와 높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6성조를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어 외에도 소수 민족의 언어 네 개를 허용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의 문자 꾸옥 응어는 중국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와 사용하던 과거의 문자를, 17세기 말 프랑스의 선교사가 라틴 문자로 적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베트남 국민의 74%는 길게 발달한 해안 근처나 평지의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는다. 때문에 농업은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베트남 경제의 기반이었으며, ·옥수수·감자·고무·홍차·커피·목재 등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이다.

특히 홍 강과 메콩 강 삼각주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쌀농사가 발달하여 세계 3대 쌀 수출국이며, 최근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도 이루어지고 있다.

공업은 농업에 비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으며, 아직까지는 노동력을 중심으로 한 섬유 산업과 경공업이 중심이다. 1990년대부터는 시장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개방하여, 국가 정책 위주였던 산업 경제 구조를 보다 자율적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베트남의 리 왕조가 멸망하자 리 왕조의 왕자는 도망 끝에 고려에 귀화하여 화산 이씨로 개명하였다. 이것이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첫 번째 접촉이었다.

 

이후 현대에 들어 남북으로 나뉜 베트남이 각각 남한, 북한과 단독 수교를 하였지만 공산당에 의해 통일된 후에는 북한과의 수교만 유지되었다.

 

그리고 1964년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나라도 참전하여, 베트남 쪽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우리나라는 1992년에 공식 수교가 재개된 후 전쟁의 피해에 대해 베트남에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현재는 경제·문화 등에서 여러 가지 교류를 하고 있다.

 

베트남은 1980년대 이후 사회주의 경제 정책에서 자본주의로 방향을 바꾸었고, 빠른 속도로 경제를 성장시킨 우리나라를 모델로 삼아, 유전 개발과 이동 통신 분야 등에서 활발하게 협력하고 있다.

 

베트남의 지역별 특징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길게 감싸는 모양으로, 동서의 너비는 제일 넓은 곳도 600km에 불과하지만 남북으로는 1,650km에 걸쳐 뻗어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북쪽은 중국의 영향을, 남쪽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고, 지형·기후 조건에 따라 홍 강이 흐르는 북부, 산악 지역으로 이루어진 중부, 메콩 강이 흐르는 남부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보인다.

 

1) 남부 지역

열대 기후인 남부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산물이 잘 자란다. 또한 메콩 강의 방대한 물길이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처 베트남 남부 지역을 통해 남중국해로 빠져 나가는데, 연간 유량이 14천 억에 달하는 메콩 강은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 주고 풍부한 층적토로 농지를 비옥하게 한다.

 

또 하구의 4km2에 이르는 비옥한 메콩 삼각주는 총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농작물의 60%와 쌀 수출량의 80%를 생산하는 곳으로, 베트남의 생활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남부를 대표하는 호찌민 시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경제·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2) 중부 지역

남부와 북부를 잇는 길고 좁은 중부 지역에는 쯔엉 썬 산맥이 뻗어 있다. 화산 토양인 이곳에서는 커피와 홍차가 재배되는데, 주로 프랑스인들이 커피 재배를 위해 만들었던 산업 지역과 일부 비옥한 평지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지형이 험난하여 몇몇 산악 민족을 제외하고는 인구가 적은 편이다.

 

중부 지역은 토지가 척박하고 험난한 기후와 잦은 태풍 같은 자연 환경에 여러 전쟁으로 광범위한 피해가 더해져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오히려 이 지역 주민들에게 강한 정신을 갖게 하여,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유명한 영웅들을 탄생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 북부 지역

여름과 겨울이 뚜렷한 아열대성 기후를 가진 북부에는 중국과 베트남을 분리시키는 높은 산맥들이 있어, 중국으로부터 베트남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왔다.

 

또한 중국에서 시작된 홍 강은 매년 1,220의 물을 바다로 흘려보내면서 15,000km2 면적에 달하는 비옥한 평야인 홍 강 삼각주를 만들어, 북부 문화의 발원지가 되었다.

 

홍 강 기슭에는 1010년부터 천 년 가까이 베트남의 수도인 도시 하노이가 있다. 하노이는 남부의 호찌민보다 도시 규모는 작지만, 베트남 정치·문화·교통의 실질적인 중심지이기도 하다.

 

 

기상 5:00

식사 6:00

호텔출발 07:08

어제 0시에 도착하여 피로가 다 가시지도 않아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오늘도 하노이에서 사파까지 이동거리가 길고, 사파에서 트레킹이 잡혀 있어 일정이 빠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하고 준비하는라 바쁘다. 남정네들이야 얼굴에 물 찍어 바르고 할 일이 별루 없지만 아짐들은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서두르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부지런히 준비하고 6시부터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아침식사를 한다.

우선 오믈라이스, 계란 후라이 하나씩 챙기고, 쌀국수 한 그릇 챙기고, 입맛에 맛는 치즈류, 베이컨, 소시지, 야채, 김치, 찰밥한덩이를 준비하여 그래도 모처럼 든든히 먹는다.

식사가 끝나고 양치하고 다시 로비로 내려와 기다려 0708분 하노이 호텔을 출발한다.

 

사파호텔도착(MUONG Thanh Sapa Hotel) 13:05

오늘 사파까지 이동시간은 6시간이라고 한다.

호텔을 나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날씨의 하노이를 빠져나간다. 날씨는 안개가 짙게 낀 날씨로 음침하니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않다. 미세먼지라고도 하는데 이곳 지형이 습지가 많아 이런날씨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가는 길도 우측으로 큰강을 끼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안개가 벗어지기는 어렵겠다. 시내를 벗어나며 시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막 모내기를 한 농토도 보이고, 모내기를 해서 푸릇해진 농토도 보이고 논에 오리를 키우고 있는 모습, 논둑에 심어진 푸릇한 바나나나무가 많이 보인다. 이렇게 하여 고속도로 매표소에 0757분 통과하여 달리면 거리는 매우 한산하다. 설명절로 더욱 한산해진 고속도로는 가끔씩 오가는 차량이 보일뿐 너무 한가하다. 845분 첫 번째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20분 휴식을 취한다. 화장실은 그리 깨끗하지는 못해도 악취는 나지 않는다.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 옆쪽의 매장은 깨끗해보이지 않고 상품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마님 망고 산다고 시간을 다소 많이 지체한다.

이렇게 하여 첫 번째 휴게소에서 20여분을 쉬고 이제 고속도로를 달리며 너무 심심한지 술판을 벌인다. 역시 술판을 벌이니 시간은 잘 간다. 어느덧 두 번째 휴게소에 도착한다. 1022분 도착하여 17분간 휴식 후 다시 달리며 나머지 술판을 이어가고 50여분 후 매표소를 빠져나가며 사파로 들어가는 입구인 라오까이 삼거리가 가깝다.

이제 술판도 끝내고 1140분 라로까이 삼거리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들어가면 작은 휴게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망고 산다고 우리마님 일정이 빠듯함에도 시간을 자꾸 축낸다. 라오까이 삼거리 휴게소에서 20여분이상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사파로 향하는 길은 언덕을 오르는 꼬부랑길로 우리나라 대관령 옛길을 오르는 것보다 더 험하다. 이러저리 휙휙 돌아가는 버스에 몸은 가누기 힘들지만 보이는 경치는 역시 멋지다.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오르니 좌측 언덕 아래로 펼쳐지는 다랭이논이 가히 일풀인지라 모두가 와~~~~ 탄성이 절로 난다. 이렇게 하여 1시간가량을 오르면 사파 주민이 사는 마을 지나고 관광지인 사파시내 호수가에 1255분 닿는다.

여기서는 대형차량의 진입이 불가하여 걸어서 사파호수 둑을 거쳐서 건너편에 있는 호텔에 도착을 한다.

 

사파

해발 1650m 산악지대에 위치한 사파. 다양한 산악 부족들의 도시로써 12개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블랙 흐몽 족, 플라워 흐몽 족, 레드 자오 족 등이 있다. 사파 중심의 시장에서는 소수민족의 다양한 전통 의상과 악기, 음식들을 볼 수 있다.

 

 

사파 식당(GERBERA RESTAURANT) 13:42~14:14

호텔에 도착하여 부지런히 방배정(대부분 3) 받고 짐 올려다 놓고 큰 짐 받아 놓고 나온다. 미리 준비한 명단을 가이드에게 건네니 에고 이렇게는 안 된다고 한다. 시내구경하고 트레킹 팀으로 나누란다. 일단 트레킹 팀을 나두고 나머지는 시내구경팀으로 하라하고, 최소한 깟깟마을 까지는 댕겨와야 한다고 열을 올리며 결정을 이사장님이 해야 한다고 분위기를 조성한 후 트레킹팀 6명은 먼저 출발하여 호수가를 걸어서 여행센타가 있는 고개를 넘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식당이 나온다. 여기 까지 걸어 오는대 10여분을 걸린 것 같다.

식당은 2층에 있으며 식단은 상추쌈과 잡채, 생선, 돼지고개가 특히 맛있었던 같다.

식사를 마치고 트레킹 팀부터 출발을 한다.

 

사파 따반 트레킹 14:14 ~18:28

소수민족과 대자연 숨겨진 산악 휴양지베트남 사파

베트남 사파는 하노이 북서쪽 350에 위치한 해발 1650m의 산악지대다. 베트남의 옛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흐멍족, 자오족, 따이족 등 고산족들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계단식 논이나 전통 문화를 간직한 소수민족의 팍팍한 삶도 새로운 볼거리다.

사파는 20세기 초 프랑스에 의해 개발됐다. 사파의 기후가 좋아 남쪽엔 달랏을, 북쪽에는 사파를 휴양지로 지정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다. 사파는 9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마을 주변에 드넓게 형성된 신비롭고 스펙터클한 자연경관이 입소문을 통해 외국 여행자들에게 알려지면서부터다.

 

사파의 중심지는 사파타운.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유러피언 스타일의 아담하고 정감어린 거리다. 사파 성당을 중심으로 한 작은 도시는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만하다. 라오카이를 왕래하는 버스 종점도 성당 바로 근처에 있다. 주말 시장은 사파 시장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열린다. 숙박 시설은 성당 주변을 중심으로 많이 있다. 시장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까우마이 거리에 아담한 번화가가 있고 레스토랑, 토산품 가게, 호텔 등이 몰려 있다.

 

사파시장은 사파지역의 개성을 가장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곳이다, 토요일에 가장 큰 장이 서는 정기시장. 점차 상설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식료품은 시장 입구에 모여 있다. 소수부족들의 전통 공예품도 판매된다. 매주 토요일 밤 펼쳐지는 러브마켓도 관심거리다. 소수부족의 처녀총각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서로의 짝을 고르는데 아름답고 기분 좋은 풍경이다.

 

사파의 판시판산은 해발 3143m, 인도차이나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베트남 최고봉인 판시판산은 고원지대로 울창한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호쾌한 풍경과 원시림 그리고 원숭이나 산양 등 각종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판시판산에서는 고도차 1410m, 세계에서 가장 큰 고도차를 자랑하는 케이블카를 경험할 수 있다.

 

사파 동남쪽에 위치한 함종산은 베트남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난초를 볼 수 있다. 1880m의 함종산은 용의 전설이 긷든 곳이다. 특히 산자락의 지형에 맞춰 인공으로 만들어진 함 롱 화원은 194600여 가지의 란 화원, 유럽화원, 벚꽃 숲 등이 조성되어 있다. 함종산 정상으로 올라 갈수록 중국 운남 석림이 떠오를 정도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깟깟 마을 트레킹은 소수민족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여행이다.

산등성이를 개간한 계단논과 밭에서 쌀과 옥수수 등을 수경으로 재배하고 있다. 깟깟 마을 트래킹은 흐멍 소수부족의 살아있는 순수한 생활상,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3대 다락논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산중턱을 개간한 계단식 논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따반마을에서는 베트남의 진정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베트남 사파(Sapa, 싸파)에서의 핵심은 트레킹(Trekking, Trek Tour)이다. 사파(Sapa)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은 라오짜이(Lao Chai, 라오차이), 따반(Ta Van), 따핀(Ta Phin) 등이 있다. 트레킹 코스는 사파 시내의 여행사(고산족 자립을 도와주는 대표적인 여행사로는 사파 오짜우(Sapa O'Chau)가 있다) 또는 숙소 등에서 진행하는 투어에 참여하면 손쉽게 다녀올 수 있다. 당일 코스 외에도 1박 이상의 일정 등 다양하다.

 

 

사파 따반 트레킹은 대략 12km6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우리는 점심식사후 1414분 출발을 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다 참석은 할 수 없고 6명이 출발을 한다. 식당골목에서 걸어서 위쪽으로 오른 후 좌측으로 모노레일 아래를 따라 진행을 하면 이후 깟깟마을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우리는 현지인가이드1, 또 베트남 한국 가이드 전부장과 함께 8명이 출발을 한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서다 멋지게 닿아 오는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다시 내려서면 트레킹 코스 입구에 도착을 한다. 이곳으로 내려서며 우리 나머지님들이 택시를 타고 내려가 우리보다 먼저 트레킹 코스로 진입을 하였다. 이후 골목을 따라 내려서면 몇몇 토산품점을 지나고 그네와 새둥지가 있는 전망대에 도착을 한다. 먼저 도착한 우리님들이 새둥지 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장면도 보인다. 여기서 내려서면 두 번째 전망대로 커다란 노랑색 커피잔 모형이 있는 전망대로 우측으로 잠시 들어간다. 전망대에서는 계단식 논이 보이고 마을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역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잠시 그네도 타고 다시 나와서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흐멍족 집을 구경 할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냥 통과를 한다.

 

깟깟마을 15:05 ~15:20

이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깟깟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다. 사진 몇장 찍고 깟깟마을 다녀오는데 25분을 준다. 이래서 우리는 깟깟마을로 향한다. 몇 개의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깟깟마을 다리를 건너 아래쪽으로 내려서면 깟깟폭포가 나온다. 우리나라 어디서 본 듯한 이끼폭포와 흡사한 모습의 폭포로 물줄기가 세차게 내려온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다시 좌측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서서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여 다시 내려서오면 깟깟 마을 다리에 닿는다. 택시를 타고 온 우리님들이 벌써 우리뒤를 바짝 쫒아서 폭포까지 도착을 했다. 여기서 발이 빠른 박여사와 김성회여사님은 우리팀에 포함 시켜 함께 따반까지 갈수 있도록 하여 팀에 합류시켜 트레킹을 진행한다.

전망대에 도착하여 계단을 올라서서 반대편으로 넘어서면 빨강띠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들을 지나서 좁다란 다리를 건넌 후 트레킹은 계속 이어진다. 굵직한 대나무지대를 통과하고, 계단식 논달뱅이가 이어지는 널찍한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물소들이 가끔은 길을 막기도 한다. 평탄하게 이어지는 던 길은 어느덧 서서히 오르고 다시 서서히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진행하여 우측으로 좁다란 협곡이 있는 지점을 지나며 다소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오르면 첫 번째 조망이 좋은 전망대에 닿는다. 현재시간 1552분으로 트레킹 시작 1시간 40분이 지난 시간이다.

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먼 곳 판시판산 위쪽 구름 틈사이를 비집고 내리 쬐는 햇살은 그빛이 강렬하여 어느 예수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후 옷가지가 주렁주렁 널려 있는 민가뒤편을 지나 좁다란 길로 접어 들어가면 두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트레킹 코스는 간단해 보이기는 해도 길이 여러 갈래가 있으니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꼭 필요하겠다. 전망이 좋은 곳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민가 옆을 지나며 뛰어놀던 아이들이 금시 닿아와 작은 기념품 사라고 내밀지만 필요한 물건은 보이지 않으니 살수도 없고 떼어놓기 민망하다. 셋째가 과자 몇 개 주어 달래고 다시 진행을 하면 우측으로 건물 몇채가 보이는 높다란 지형의 반대편 전망대에 닿는다. 앞쪽으로는 따반 트레킹 사진에서 보았던 경치가 보이는 곳이다. 여기서 사진들 찍고 내려서면 널찍한 세멘트길에 닿는다. 세멘트 길을 따라 좌측으로 나가면 세멘트길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먼저 앞서가던 몇몇이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다시 불러 세워 우측으로 내려서면 조금 전 보던 경치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매점이 있다.

 

세멘트길옆 매점 16:31 ~16:55

여기서 우리는 맥주 몇 캔시키고 쉬었다 가기로 한다. 앞쪽에 보이는 다랭이논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다랭이논 사이로 올라가는 골목길과 그사이에 모락모락 연기를 피어내는 민가가 있어 더욱 경치가 아름답다. 좌측으로 다랭이논 가장 위쪽 동그라미가 몇 개 보이고 우측으로 물이 차인 다랭이논은 그 빛깔이 아름답다. 캄보디아는 우리가 적기에 구경을 갔지만 이곳은 사실 4~5월 꽃이 피고, 다랭이논에 물이 가득 고였을 때가 가장 아름답고, 가을에 곡식이 누렇게 익었을 때가 두 번째로 경치가 좋다고 하는데 우리는 때를 조금 잘못 맞추기는 했지만 여기가 우리나라처럼 겨울이라해도 다 얼어붙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복숭아 꽃이 피고 가끔씩 야생화도 보인다. 전망대에서 맥주마시고 주변의 경치에 동화되어 사진찍고 즐긴후 우리는 다시 세멘트도로를 따라 내려선다. 내려서다 더러는 샛길로 빠져서 왔는데 길이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워 별로 빠르지는 않다. 이후 세멘트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다시 좌측 편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샛길을 따라 내려서면 협곡의 강이 서로 합쳐지는 부근의 다리(1721)에 닿는다.

 

철판다리 건너 커피집 17:36 ~17:58

다리를 건너 세멘트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몇분 후 라오짜이 마을이 가까이 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어둠이 내려앉은 라오짜이마을과 다랭이 논들이 볼만하고 강 건너 마을회관 앞에서 뛰어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귀엽다. 잠시 더 가면 좌측으로는 사파로 가는 도로 쪽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라오짜이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얼마 안가 철판다리가 나온다. 천판다리를 건너며 좌측으로 커피집이 나온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는 현지인 가이드의 친형이 운영하는 가게라 하는 대 오늘은 명절이라 쉬는 날이지만 특별이 온 손님이니 커피와 난 맥주로 입가심을 한다.

 

따반 다리 18:27 ~18:28

철판다리 옆 커피집에서 20여분 쉬었다가 다시 라오짜이 마을 길을 따라 걷는다. 좁다란 거리에는 구멍가게등 가게들도 보이고 비교적 마을이 큰 편이다. 이렇게 하여 한동안 나가다가 우측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학교라고 하며 가이드도 이 학교를 나왔다고한다. 이제 어두워진 거리를 따라 나온다. 마을의 불빛으로 거리는 보이기 때문에 후레쉬 까지는 켜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움푹 파인 곳에서는 움찔댄다. 이렇게 하여 철판다리에서 약 2.5km거리를 30여분 만에 나오면 따반 다리에 닿는다.

이렇게 하여 12km의 트레킹 4시간 15분 가량에 마치고 다리 앞에서 대기 하고 있는 미니 버스에 승차하여 사파시내 식당으로 향한다.

 

사파시내 식당(Sapa Lotus) 18:48 ~19:36

따반 다리에서 미니버스로 이동하여 산길을 따라 나온다. 비포장인지 매우 흔들린다. 20여분을 나오면 사파시내 점심식사를 하던 바로 아래쪽 사파 로터스라고 하는 식당으로 음식은 흰쌀밥과 국물이 든 음식(토종닭), 감자튀김, 야채볶음, 생선튀김, 피자등을 맥주와 곁들여 먹었다. 우리와 함께 한 현지인 가이드와 사진도 찍고 헤어진 후 우리는 50여분 가량 음식을 들고는 트레킹 팀은 걸어서 식당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미니버스로 호텔로 귀가를 하였다.

 

호텔 도착 19:58

사파의 밤거리는 불빛으로 화려하다. 대낮에 보는 모습과는 상이한 모습이다. 오늘이 명절이라 대부분 식당문을 닫았음에도 몇몇 문을 연 식당들은 사람들로 붐빈다. 여행센타를 지나서 고갯마루 좁다란 골목에 장식한 화려한 조명등아래에서 간단히 기념사진도 찍고 잠시후 호숫가를 거닐며 호텔에 도착하니 1958분이다.

오늘 모처럼 일정이 일찍 끝나 편하게 쉬겠거니 하였는데 에고 우리 딸이 아빠 내려오란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돌자고 한다. 호숫가 둑을 따라 천천히 사진찍고 돌아서 여행센타 앞 광장에 도착하여 앞쪽에 보이는 선프라자 건물을 보고 있자니 저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다. 글씨 모르겠다고 하니 아래쪽으로 보란다. 사파 스테이션이라고 적혀 있다며 사파역이라고 한다. 그래 그러면 사파역은 맞지만 기차역은 아니고 아까 우리가 지나가던 길 위에 보이던 모노레일을 타는 정거장일게다 하고는 우리는 다시 자리를 떠서 호숫가를 거닐어 호텔에 도착을 하니 40여분이 걸린다.

이렇게 하여 3일차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휴식이다.

 

4일차

124일 금요일 날씨 맑음, 오후에 베트남 하노이는 비

 

기상 06:00

아침식사 07:00

호텔출발 08:00

 

판시판산

해발고도 3,143m로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에서도 가장 높은 산이다. 사파(SaPa)에서 남서쪽으로 약 9km 떨어져 있다. 주변의 지역을 압도하듯 서 있지만 이 일대 특유의 날씨 탓에 정상부는 거의 구름에 가려있어 산 아래에서는 정상을 볼 수 없는 날이 많다. 사파를 중심으로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있으며 이들은 각 부족마다 고유한 복장과 풍습을 지키며 살아간다. 이 산을 오르려면 사파를 거점으로 삼아 직접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2016년에 케이블카가 완공되어 지금은 운행 중이다.

세계최장 케이블카 (6,293m)를타고 순식간에 올라갈 수 있으며, 정상부에는 등산열차가 있어 최고봉까지 편히 올라갈 수 있다.

 

호텔에서 미니버스로 사파 스테이션에 도착하여 안으로 입장을 한다. 현지인 가이드가 입장권 끊어오느라 잠시 기다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니 모노레일 열차가 도착을 한다. 이 열차를 타고 사파역을 0820분 출발하여 어제 우리가 가던 트레킹 코스 위로 달리는 열차는 10분후 상부 역에 도착을 한다.

 

 

케이블카 08:50 ~19:13

모노레일 상부역에 도착하여 걸어서 케이블카를 타러간다. 걸어서 가는 길옆으로 곱게 단장한 꽃밭이 너무 이쁘다. 흰색의 유채밭, 튜립등 멋지게 조성한 단지로 볼거리가 상당히 많아서 걸어가는 내내 지루함이 없는 곳이다. 이사장님은 힘이든지 공사중인 트렉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세워서 타고 가다가 우리가 다시 세워서 원로하신 두분을 다시 태우려고 하는 대 가이드가 막 쫒아와서 내리라고 한다. 결국 세분은 뒤문으로 편하게 입장을 하셨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 꽃밭도 구경하고 동굴 터널을 지나서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판시판산으로 오른다.

 

모노레일 09:38 ~09:39

케이블카는 2016년 스위스회사에서 건설한 것으로 길이가 6293m로 상당히 길 다란 케이블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오늘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맑아서 모두들 기분이 좋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깟깟마을 위쪽 다랭이논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며 따반트레킹의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코스도 멋져 보인다. 이렇게 오르면 점점 고도를 높이며 올라서 그 험한 산 중간중간 관리인들이 머무는 관리소들을 바라보며 올라가는데 그 관리인들이 머무는 숙소를 잇는 가파른 길도 아슬하슬하게 내려다보인다. 이렇게 하여 오르면 약 23분후 상부 케이블카 탑에 도착을 한다. 여기서 하차하여 위쪽에 보이는 불상과 탑을 향하여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계단을 오르며 보는 모습이 장관이다. 올라온 반대편의 바위산이 멋지고, 산 아래 펼쳐진 운무가 장관이다. 종탑이 있고, 흰색의 석가 여래좌상이 있는 사찰 앞을 지나서 오르면 숨이 차는지 발걸음이 더뎌지며 머리가 어질하다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몇알 미리 준비한 고산증약 몇 분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올라서 마지막 모노레일 승강장 앞에 도착을 한다.

 

판시판 산 9:39 ~10:43

모노레일은 순식간에 오른다. 오르는 시간은 1분이다. 이렇게 하여 세 번에 걸쳐 타고 오르면 쉽게 판시판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판시판 입장료는 없으며 모노레일 및 케이블카 타는 경비가 왕복 65천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판시판 산은 케이블카 오르는 방향으로 석가모니 좌상이 있고, 따반마을 쪽 능선으로 경치가 멋지게 이이지며 그곳에 관세음보살상과 석탑이 있다. 좌측으로 바위산의 모습이 아름답고, 우리가 올라온 쪽으로 널찍하게 펼쳐있는 운무에 덥힌 계곡의 모습도 볼만하다. 정상에는 4개의 삼각형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이 설치되어 있고 베트남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국기도 비치되어 있다.

판시판산 정상에서의 모습은 매우 멋진 모습으로 오늘처럼 이렇게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정상에서 사진찍고 관세음보살을 구경하고 부처님상이 주욱 늘어선 사면길을 따라 나오는 대 대략 1시간 5분 가량이 걸렸다.

내려올 때는 모노레일은 타지 않고 내려오고 일부 나이드신 4분만 타고 내려왔다.

 

식당(NHA HANG ANH DUNG) 11:39 ~12:47

1043분 케이블카에 승차하여 내려오는 대 구름이 몰려 들기 시작한다. 한참을 내려오니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케이블카가 멈춰선다. 설계상 바람이 어느정도 세기로 불면 멈춰서게 되어 있다고 한다. 케이블카는 이후에도 한번 더 멈춰선 후 27분후인 1110분 하부 케이블카 승강장에 도착을 한다. 산경표를 켜고 왔는대 대략 6.3km가 나온다. 여기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 꽃밭을 지나 우리가 올라온 반대편으로 조금 올라서니 미니버스가 도착을 한다. 우리는 이 버스로 10여분 이동하여 사파시내 여행센타 앞에 있는 식당에 도착을 한다. 식당에서 송어회와 야채를 넣고 끊인 물에 송어 회 뜨고 남은 고기를 넘어서 먹는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이제 베트남 하노이로 향한다.

 

하노이 식당(미소) 17:50 ~18:30

식사를 끝내고 호수옆 도로까지 미니버스를 타고 3분을 내려간 후 거기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사파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왔던 대형버스로 갈아타고 하노이로 향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악도로를 따라 내려서서 50여분 후 라오까이 삼거리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을 한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대부분 잠이 들어 약 1시간 40분후인 1522분 휴게소에 도착하여 잠시 정차 후 1550분 다시 달리면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 비가 오기 시작하여 미소라고 하는 식당에 닿을 때는 비가 수월찮이 온다. 사파에서 여기까지 도로가 한산하여 비교적 빠른 시간인 5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미소라고 하는 식당에서는 한식으로 보글보글 끊는 찌개에 흰쌀밥, 김치, 부침게, 미역줄기, 호박나물, 두부조림등으로 식단이 차려 졌다.

50분여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니 쏟아지는 폭우로 길은 물바다가 되고 직원들이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버스에 오르지만 신발이 젖고 바짖가랑이가 젖어 구질구질하다.

 

하롱베이 호텔 도착(BAO MINH Radiant Hotel Halong) 2025

하노이 미소라고 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하롱베이로 향하며 30여분 후 우측에 있는 휴게소에 도착하여 잠시 볼일보고 간다. 명절휴일이라 그런지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다. 화장실은 비교적 깨끗한 곳이다. 다시 1시간 20여분을 달려 하롱베이의 명물인 길다란 다리를 건너서 잠시 더 진행한 후 골목으로 들어가 우리가 묵을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호텔에 도착한 후 이사장님이 준비한 노래방으로 이동을 하였으나 분위기에 전혀 맞지를 않아 우리는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거의 2시간 동안 꿈쩍 않고 앉아 있다가 나왔다.

그냥 선술집에서 맥주나 소주 한잔 정도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5일 차

기상 05:00

식사 06:00

호텔출발 07:10

 

하롱베이

중국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넓이 1,553에 이르는 만이다. 베트남 제1의 경승지로, 1962년 베트남의 역사·문화·과학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중 하롱베이의 중심지역(434 km²)1994년 그 아름다운 경관으로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 목록 가운데 자연공원으로 등록되었다.

'(Ha)''내려온다', '(Long)'''이라는 뜻으로, '하롱'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라는 의미이다. '하롱'이라는 지명은,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를 막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이곳으로 내려와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자, 그 보석과 구슬들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갖가지 모양의 기암(奇岩)이 되어 침략자를 물리쳤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석회암의 구릉 대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이나 비바람에 침식되어 생긴 섬과 기암이 에메랄드 그린의 바다 위로 솟아 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섬들, 환상적인 동굴이 있는 섬들이 기후나 태양 빛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광경 등이 절경을 이룬다.

긴 세월에 걸쳐 자연이 조각해 낸 기암에는 개·귀부인·물개·사람머리·엄지손가락 등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사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무인도이지만, 많은 종류의 포유동물과 파충류, 조류가 서식하고 다양한 식물상이 존재한다. 주로 바문섬과 캣바섬에서 열대림이 발견되며, 바다에는 1,000종 이상의 어류가 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섬들에는 종유동(석회암동굴)이 있는 곳이 많다. 수억년의 세월에 걸쳐 석회를 머금은 물은 천정으로부터 종유석을 흘려 내려보내고 바닥에서는 석순을 쌓아올렸다.

몇 개의 섬에서는 4500년 전의 잘 다듬어진 돌도끼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베트남 본토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돌도끼였으며, 혼가이섬에서는 호아빈 문화로 알려진 1만 년 전 인류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만 안에는 2030가구가 모여 사는 해상 마을이 5개 있다. 작은 바위에 밧줄로 묶어놓은 해상 가옥들이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의 바위 사이에 떠 있다.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100여 만 명에 이른다.

 

하롱베이는 굴양식과 못난이 진주조개 양식을 많이 하며 하롱베이에는 3가지 없는대 첫째는 파도요, 둘째는 갈매기요, 셋째는 물이 짠내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가이드는 열심히 설명을 하지만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태국 아유타야섬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중국의 계림과 태국의 아유타야섬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하롱베이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됐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한다. 우쨋든 경치가 좋은 곳이니 관광객이 많은 것은 맞을 것 같다.

 

하롱베이 관광 07:38 ~12:30

하롱베이는 약 4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름이 있는 섬이 대략 100여개이고 사람이 사는 유인섬이 4개 정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하롱베이 "LOI RA CANG"이라 적힌 선착장에 도착하여 현지인 가이드가 표를 끊어 온후 장소를 옮겨 “TOAN CANG 38"이라 적힌 배에 오른다. 40여명이 승선할수 있는 배이지만 우리팀원 20명만 태운다. 우리가 먹을 먹거리를 싣느라 잠시 지체를 한 후 배가 0738분 앞쪽에 보이는 하롱베이의 섬을 향하여 나간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향해 나가는 데 날씨가 좋지를 않아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우중충한 날씨다. 잠시 비가 뜸할 때 배위로 올라가 바람을 쐐며 하롱베이의 모습을 감상하며 20여분을 진행하니 베트남 화폐에 나온다는 경치가 앞으로 닿아온다.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진행을 하면 선원들이 와인 및 과일등으로 상을 차리고 우리를 기다린다. 그사이 우리는 우측으로 오늘 비가 와서 오르지 못할 전망대를 지나친다. 빗줄기는 점점 세차지고 우리는 배안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진행으로 케이크와 와인 잔으로 가득한 상에 순서대로 두 사람씩 나가서 와인 잔을 들고 각자 좋은 말 한마디씩 하고 돌아와 전체적으로 자리에 앉아 와인 잔을 높이 들고 축배를 들었다. 이렇게 하여 진행하는 동안 배는 모터보트를 타는 곳에 도착을 한다.

모터 보트에는 각자 나누어 준 허름한 우비를 입고, 안전을 위하여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승선을 하여 쾌속으로 달리니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얼굴을 때려 따갑다. 0910분경 출발한 모터보트는 약 5분을 달려 쪽배를 타는 곳에 닿는다.

쪽배 타는 곳에 도착하니 비는 억수 같이 쏟아지지 쪽배는 지붕도 없지 배타기가 엄두가 나지 않은 듯 저 배는 안탄다고 뒤로 나자빠져 우리는 곧장 금시 타고 들어갔던 모터 보트를 타고 섬 둘레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나지막한 산꼭대기에 용이 올라갔다는 용굴이 있고, 중간쯤에도 동굴이 보이는 섬을 둘러보고 다시 나와서 우리가 타고 들어간 배에 도착하여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전망대도 비가 많이 와 미끄럽다하여 포기 하고 석회석 동굴을 둘러보기로 한다.

 

동굴 10:25 ~10:50

동굴입구에 도착하니 배들로 만원이다. 배를 접안시킬 틈이 보이지 않는데 선장은 좁은 틈으로 밀고 들어가 배를 동굴 앞에 접안시킨다. 놀라운 기술이다. 동굴은 짤막하여 25분이 소요되어 구경을 마치고 내려온다.

 

선착장 도착 12:30 ~12:42

동굴을 구경하고 다시 돌아와 우리는 배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서서히 움직이는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달리며 우리에게 또다른 선물을 선사 한다. 아침에 파닥파닥 뛰던 생선이 어느덧 회로 쳐져 식탁에 올라오고, 이어서 꽁치 튀김, 야채, 새우튀김, 야채등으로 한상 가득 차리더니 차차로 게찜, 문어, 가재, 새우머리 튀긴 것, 생선찜, 조개 양념무침, 굴 구운 것, 또 오징어 무침이 나오니 모처럼 포식을 한 것 같다. 소주, 나는 맥주, 마지막으로 선장이 따라준 빽알 맛 나는 베트남 소주 맛이 정말 좋았던 같다.

이렇게 흥을 돋아준 덕에 우리형제를 비롯하여 이번 여행에 함께한 여러아짐들 1시간여 동안 즐거운 시간 보냈다.

 

커피점(Chon Cafe) 13:00 ~13:29

선착에서 하롱베이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사양노루 똥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서는 족제비 배설물로 만들었다는 커피로 커피를 내리는 설명과 함께 커피맛도 보고 구입하실 분들은 구입을 하여 나왔다.

 

휴게소 14:50 ~14:57

커피점에서 1시간 20여분 후 갈 때 들렀던 휴게소에 잠시 정차

 

하노이 시내구경 15:45 ~17:00

하노이

하노이는 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으로 1831년 구엔 왕조에 의해 불리워졌던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하노이라는 이름 이전에는 레왕조(,1428~1787) 말기 '통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4592일 베트남의 공식 수도가 되었으며, 20109월 도시건설 1,000년을 맞이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역사

하노이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꼬 로아 성채는 기원전 2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최초 주거지로 평가받고 있다. 하노이가 베트남의 중심 도시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하노이의 지리적 위치 덕분이었다. 7세기 무렵 당나라가 지배하던 중국은 남중국해와 활발한 교역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하노이가 원난과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어 자연스레 주요 거점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안남도호부까지 설치되어 활발한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던 하노이는 당 말기가 되면서 중국이 다른 새로운 교역로를 개발함에 따라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첫 번째 리 왕조(1009~1225)에 의해 떠오르는 용이라는 뜻의 탕롱으로 불리우며 베트남의 수도가 되어 마지막 왕조인 구엔왕조(1802~1945)가 집권한 1802년까지 베트남의 수도이자 정치행정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이후 1902년 프랑스가 침략하여 지배하던 시절에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가 되었으며 1940~1945년 일본점령기에도 여전히 행정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19459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북 베트남)이 하노이에서 독립 선언을 한 이후, 하노이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 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1975년 남베트남의 붕괴 이후 북베트남이 세력을 확장하여 197672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하노이가 수도로 정해졌고, 20088월 하떠이 성을 통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기후

하노이의 기후는 전형적인 아열대 습윤기후이다. 여름에는 덥고 습하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시원하고 건조한 특징을 보인다. 여름은 5월에서 9월까지 이며, 11월 부터 이듬해 3월 까지 지속되는 겨울에는 다소 건조한 날씨가 계속된다.

 

경제

1954년 이후 공업이 발달하여 공구, 발전기, 합판, 직물, 화학제품 등을 주로 생산해왔다. 이후 하노이는 1990년대 이래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하였다. 1991년부터 1995년 동안 19.1 %, 1996~2000년에는 연평균 15.9%, 2001~2003년에는 20.9%에 달하는 성장율을 내기도 하였다. 관광, 금융, 부동산, 은행업이 하노이의 경제 발전의 주요한 축이다. 또한 교통 중심지로서 주변 도시들과 연결성이 높아 무역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하이난은 철도를 통해 하이퐁 항[海防港],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쿤밍[昆明], 호찌민 시와 이어지며 홍강을 통해 배편으로 베트남 북부의 대부분의 지역까지 이어지며 대양으로 나가려는 뱃길로도 이용된다.

 

문화와 관광

하노이의 주요 관광 명소로는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코로아 성채, 하노이 문묘, 하노이대학교, 혁명박물관, 군사박물관, 하노이 호찌민박물관 등도 유명하다. 과거 프랑스 지배의 영향으로 프랑스 풍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어 아시아의 빠리라고도 불리며, 대표 건축물로는 대통령궁,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 베트남 은행, 성요셉 성당,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 등이 있다.

 

하노이에 도착을 하니 비기 조금은 덜 온다. 그래도 우비하나씩 다시 얻어 입고 전기차(스트릿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전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치기는 안 된다고 한다. 우쨋든 20분을 기다려 전기차 3대에 나누어 타고 하노이 시가지를 구경한다. 36거리라고 하는 하노이 구시지로 호수 주변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시내를 전기차를 타고 구경하는 것이다. 36거리는 36개의 거리별로 정해진 물건을 파는 곳으로 100년 넘은 건물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쩐까인[]1225년에 세운 베트남의 왕조인 쩐왕조[陳王朝]의 수도 탕롱[昇龍:하노이] 지역에 해당한다. 하노이 중심부인 호안키엠 북쪽에 위치하며, 각종 상품을 파는 상점으로 가득 차 있다. 크게 농업·수공업·상업과 관련된 지구로 나뉘며, 작게는 상품 종류에 따라 36개의 거리로 나뉜다.

운전기사도 우리가 한국인 것을 알고 한국인 가게라든지 은행이 나오면 손짓으로 알려준다. 거리는 비좁고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비가 우중충히 오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호수가를 한바퀴 돌고는 마지막으로 호안키엠호수 가운데 있는 사찰을 둘러보기로 한다.

호안끼엠은 '환검(還劍)'이라는 뜻이다. 15세기 여 왕조를 세운 레로이는 호수의 거북이에게 받은 검으로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승리로 이끌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찾았는데 거북이가 다시 올라와 그 검을 물고 돌아갔다고 하는 전설에서 이름을 만들어졌고,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큰 일이 생겼을 때 마다 거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다고 한다

호수 안에 있는 응옥선이라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붉은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돌던지 우측으로 돌던지 하면 된다.

 

응옥선사당 temple of the Jade mountain은 호안 끼엠 호수의 북쪽에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테 훅 The Huc이라는 붉은색 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는데, 야경이 더 좋다는 소문은 있다. 사당은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무찌른 베트남의 전쟁 영웅 쩐 흥 다오 Tran Hung Dao를 위시해 몽골군들에게 대항해 싸운 성인들과, ((()의 세 성인을 모신 공간이란다.

사실, 이 영웅 및 상징보다 응욱선 사당은 전설을 뒷받침해 주는 거북이박제가 더 인기를 끌었다. 1968년 호안끼엠 호수에서 잡혔다는 커다란 거북이의 박제는 길이 약 2m, 무게가 250kg에 달한다.

사당은 규모가 작았지만, 마치 일주문처럼 본당 정면에 호수를 바라보는 망루가 있다. 호안끼엠 호수 한 가운데는 거북이를 모시고 있다는 작은 사당이 탑처럼 세워 있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30여분에 걸쳐 사당을 둘러보고 나와서 이제 마지막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 및 상품점 17:45 ~19:30

LOTUS WORLD HANOI라고 하는 곳으로 한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아래층에는 각종 과일 말린 것, 생황용품, 옷등을 파는 곳으로 이곳에서 30여분간 쇼핑을 하고 2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간다. 하노이를 왔다가 돌아갈 때는 거의 이 식당을 이용하는지 한국인 손님들이 많다. 시원하게 끊인 김치찌개는 먹을 만 했는데 특별이 더 주문했다는 갈비는 에고 와 이리 설탕으로 범벅을 했는지 거의 먹지 않고 남은 것 같다. 상추에 싸먹기도 해보고 꼬추장을 발라 먹어도 너무 단맛이 강하여 먹지를 못하였다. 그래도 손님이 많은 것은 여기에 특별히 갈 곳이 없어서 일 것 같다.

 

하노이공항 도착 20:00

우리는 이렇게 하여 마지막 식사까지 마친 후 공항으로 출발하여 30분후에 하노이 공항에 도착을 한다. 공항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짐정리하고 곧 이어서 짐 부치고, 출국수속 마친 후 검색대를 통과하여 입국장에 들어가 24번 게이트에서 거의 2시간을 기다려 2250분 보딩후 비행기에 탑승하여 2330분 하노이공항을 출발한다.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우리가 타려다 안탄 목선이 뒤집혀 1명이 숨졌다는 기사를 보고 우리가 그 쪽배를 안타기를 천만다행이고 서로를 격려 한다.

 

6일차 마지막 날

01.26일 일요일 맑음

하노이공항을 2341분 이륙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하노이로 올 때는 600K/H대로 운항하던 비행기가 인천으로 갈때는 800K/H대로 간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대부분 잠을 청하느라 기내식도 거르지만 우리 세 식구는 갈 때와 똑 같은 기내식을 받아 들고 맛있게 먹었다. 우리 두 여사님들은 와인까지 곁들여서~~ 난 냉수 한잔 마시고 곧 배도 부르고 잠도 오고하여 한숨자고 난 것 같은대 벌써 인천공항에 거의 다 온 듯한다.

 

인천공항 도착 05:27

비행기는 하노이에서 출발하여 3시간 45분후 인 0515분 인천공항에 착륙을 한다.

갈때와 올때는 거의 비행시간이 1시간이 난다.

이렇게 하여 무사히 캄보디아와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하고 짐찾고 하여 인천공항을 06:23분 출발 한다.

 

아침식사(영종도 보문항 식당) 16:38 ~07:18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5분후 우리는 영종도 보문항이라고 하는 갈 때 김치찌개를 먹던 식당에 들러 올때도 갈때와 마찬가지로 김치찌개로 아침 든든히 먹고 집으로 향한다.

 

청주 도착 09:15

영종도 식당을 출발하여 천안에서 남숙여사 동생분이 하차하고 청주에 도착을 하니 0915분이다.

이번여행에 함께 한 우리 가족외 여러분들 힘든 여행이 었음에도 열심히 따라주시어 무탈하게 여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