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2000년 부터)

1229 보은 수정봉(568.5m), 말티재 전망대 2020.07.21. 화요일 맑음

산야55 2023. 2. 14. 20:46

보은 수정봉(568.5m), 말티재 전망대

2020.07.21. 화요일 맑음

참석인원 : 35

 

청주 09:00 -보은 사내리 레이크힐스 관광호텔옆(해발 약320m) 10:25 -커다란 물통(0.342km, 385m) 10:37 -큰바위(0.543km, 430m) 10:43 -암봉(0.914km, 510m) 10:56 -큰바위봉(1.43km, 540m) 11:09 -수정봉(정자터, 우측으로, 1.61km, 568.5m) 11:17 -바위아래 로프 11:20 -바위에 수정봉 글씨(좌측으로, 1.77km, 560m) 11:23 -우측 법주사 하산로(1.19km, 485m) 11:33 -안부고개(좌 만판동, 우 법주사) -산경표상 수정봉(우측으로 법주사 하산로 있음, 2.27km, 485m) 11:36 -되돌아서 수정봉 글씨 있는 봉(수정대, 2.75km) 11:48 ~11:53 -수정봉 글씨 있는 봉에서 남쪽 골짜기로(길 없음) - 법주사 일주문(3.72km) 12:17 - 매표소(4.31km) 12:23 -식당(큰집식당, 5.11km) 12:30 ~13:39 -정이품송앞 연꽃단지 13:45 ~14:01 -말티재 14:08 ~14:45 -청주 사창사거리 15:50 -도보 -청주 집 16:20

***법주사에서 수정봉 입구 : 금봉미륵불 옆에 있는 돌계단에서부터 출발하여 오른쪽 바위가 보이는 쪽으로 올라가면 됨

~~~~~~~~~~~~~~~~~~~~~~~~~~~~~~~~~~~~~~~~~~~~~~~~~~~~~~~~~~~~~~~~~~~~~~~~~~~~~~~~~~~~~~~~~~

<신증동국여지승람>16 보은현 산천조에 속리산과 삼파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뤄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000명이 앉을 만하고,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 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눠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남한강 지류)이 되어 금천으로 들어간다. (후략)’

 

속리산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다. 문장대와 세 강으로 흘러가는 삼파수三派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속리산을 다른 명산과 비교한 부분도 있다. 이만부(1664~1732) <속리산기俗離山記>에서다.

 

‘(전략) 청량산의 빼어남이 있으면서 포세鋪勢는 그것보다 크고, 덕유산의 깊숙함이 있으면서 기이함을 드러내어, 지리산보다 훨씬 뛰어나니, 역시 좋고 나쁘고의 품명에 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있다. 또한 우람한 집과 아스라한 구조물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과 신통의 창조를 극도로 다하였기에 가야산의 해인사와 어근버근하다. (후략)’

 

이만부는 전반부에 금강산과 비교하면서 금강산보다는 한참 모자라다고 설명하면서 다른 명산과는 비교할 만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이동항은 1787년에 속리산, 1790년에 지리산, 1791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후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이것을 <방자유록放恣遊錄>이라 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산을 다니면서 남긴 기록이라고나 할까.

 

그는 법주사로 들어가 복천사(복천암)보현재중사암중대상대문장대중사암에서 산골 물을 끼고 석문 2개를 거쳐 법주사에 투숙하며 유산 일정을 마친다. 그가 유람한 당시에도 정이품송은 유명했었던 듯하다. 이를 보면서 법주사로 들어가 유람이 시작된다.

 

칡고개에서 한 굽이를 돌아 동쪽을 바라보니, 눈 덮인 높은 산과 옥을 깎은 봉우리들이 구름 하늘 위로 우뚝하게 꽂혀 있다. 괘련송掛輦松(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로 들어갔다. 절의 오른쪽에는 수정봉이 있어, 혼자만 유달리 고상하고도 단정하며 후덕하다. 마치 풍악에 있는 천일대와 같다. 위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돌의 등은 궁륭 모양으로 둥글게 생겼고, 머리는 서쪽을 향해 쳐들고 있다. 임진년(1592)과 계사년(1693) 사이에 명나라 술객述客(점술가)이 그 바위를 보고 말하기를 중국 재보의 기운이 이 바위 때문에 점점 흩어져 없어지게 된다고 하고는 그 거북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 <산문기행> 인용

 

속리산 서쪽 수정봉은 의미 있는 듯

절의 오른쪽에 있는 수정봉은 현재의 이름과 동일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다. 속리산의 서쪽에 있다. 수정봉은 위험한 구간으로 통제구간이다. 그 봉우리 아래 법주사 방향 암벽 바위에 보물 218호 마애석불이 모셔져 있다. 강한 기운이 전해지는 듯 옛날부터 제사를 지낸 흔적이 주변에 남아 있다. 들어가는 방향으로 법주사 일주문 왼쪽에 있다. 청동미륵대불도 수정봉 아래 등지고 법주사를 지키며 내려다보는 듯하다. 그 앞쪽에 남한 유일의 목조탑인 국보 55호 팔상전이 있다.

 

법주사에는 문화재가 매우 많이 보존돼 있다. 안내판에 이런 문화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세조 얘기만 설명하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종기가 나는 등 병이 들자 쉬기 위해서 속리산을 찾았다. 그가 머문 암자가 복천암이라고 전한다. 공단에서 일주문에서 복천암 올라가는 계곡 입구까지 세조길이라고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복천암은 속리산의 정중앙에 위치한다고 한다. 지도에서도 속리산 여덟 봉우리의 정중앙으로 보인다. 분지 같이 둘러싸여 있어 공부하기 딱 좋은 암자다. 송일이라는 행자승이 나와 복천암을 자랑한다. “복천암의 세 가지 진객은 금낭화와 주목, 그리고 목단이다. 조선 세조가 마셨던 샘은 지금도 바위틈에서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일반인은 마실 수 없고, 부처님 공양수로만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복천사의 동쪽에는 대(문장대)가 있고, 천왕봉에서 모자성까지는 기이한 산봉우리들과 괴상한 바위들이 마치 긴 창과 두 갈래 창들을 늘어놓은 듯하기도 하고, 병풍과 휘장을 삼엄하게 드리운 듯하다. 저녁 해가 비스듬히 비추자 옥처럼 흰 바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이동항은 잠시 속리산의 기이한 모습에 빠진 듯하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빼어난 산세와 기이한 바위, 그리고 계곡으로 유명했다.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속리산에 대해 산세가 웅대하고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여 소금강산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지리>에서 바위의 형세가 높고 크며, 첩첩 봉우리의 뾰족한 끝이 모여서 막 피어나는 연꽃 같고, 횃불을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돌로 이루어진 계곡이 싸고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이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다고 묘사하고 있다.

 

세조가 쉬었다는 복천암은 속리산 정중앙

속리산은 지금도 8, 8, 8석문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 이름도 8가지나 된다. 속리산이란 이름 외에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구봉산九峰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紫霞山이라는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교적 색채를 많이 띤다. 속리산·광명산·지명산·미지산·자하산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특히 법주사 주변의 속리산은 불국토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적 색채가 짙다. 한때 암자만 1,000개에 달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반면 화양동구곡 주변의 속리산은 유교적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뿐만 아니라 조선 선비들이 주로 화양동 구곡과 선유동 구곡에서 음풍농월하면서 남긴 마애석각이 곳곳에 아직 전한다.

 

속리산의 옛 이름 구봉산은 속리산의 아홉 봉우리에서 유래했다. 실제 봉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지만 뚜렷하게 손꼽을 만한 봉우리가 아홉 개다.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상학봉이다. 그런데 아홉이란 숫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양사상에서 아홉이란 셀 수 없이 매우 많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실제 속리산에 수많은 봉우리가 있는데, 굳이 아홉이란 숫자를 부여한 것은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에서 특히 손꼽을 만한 봉우리 8개를 팔봉이라 했을 것이다.

8대는 여덟 개의 큰 돌을 말하며,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가 이에 해당한다. 바위가 문을 만들어낸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이 있다. 속리산을 유람하면서 8, 8, 8석문만 찾아다녀도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속리산 정중앙에 있는 복천암 세조가 휴양차 머문 암자로 알려져 있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관음봉과 서북능선.

이동항은 복천사(지금의 복천암)에서 북쪽으로 꺾어 보현재를 넘는다. 지금의 탐방로와 코스가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보현재에는 보현재휴게소가 있다. 국립공원 전 지역의 휴게소를 전부 철거했는데, 이곳에는 아직 남아 있다. 동행 안내하는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이한웅씨는 법주사에서 계약을 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공단에서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옛날 정취가 남은 휴게소다. 잠시 쉬어간다.

이동항은 중사암에 오른다. 중사암은 지금 중사자암으로 알려져 있다. 비법정탐방로 구간에 있다. 공단의 협조를 받아 직원의 안내로 찾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파헤쳐 영락없이 개 형상으로 생긴 바위 입구를 지나 10여 분쯤 계곡으로 간다. 갑자기 하늘이 뻥 뚫린 듯한 평지가 나온다. 20m는 족히 될 법한 큰 암벽을 지나자 중사자암이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안내한 이씨는 중사자암 승려는 입구 바위는 개가 아니라 사자 형상이라고 주장한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무리 봐도 개 형상이다. 큰 암벽 바위벽에는 자를 새겨놓고 있다. 아늑한 분위기에 전망은 매우 좋다.

 

문장대에 있었던 백석정은 흔적 없어

이동항은 암자는 산의 뾰족한 끝에 있어, 높이가 이미 이 산 높이의 절반을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산세가 뚝 끊어져 매달린 듯하고, 바위 뿔이 아슬아슬하다. 고개등마루를 올라서니 홀연 백석정이 보인다. 백석정은 하늘 한가운데 우뚝하게 솟아 있으니, 정말로 이것이 바로 문장대의 참면목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갓과 옷을 벗고 바위틈을 따라 몸을 굽히고 꺾으면서 올라갔다. 바위틈이 다하면서 바위의 면이 둥글고 평평해져서 마치 큰 왕골자리를 깔아놓은 듯하다. 이것이 중대中臺이다. 중대 위에는 또 큰 바위가 도끼로 쪼아진 듯하니, 이것이 바로 상대上臺이다. 상대 위에는 저절로 큰 웅덩이가 이루어져 있는데, 여름에 큰물이 지면 넘쳐흘러서 물이 세 줄기로 나눠 흐른다. 북쪽 모서리가 넘쳐흐르는 것은 용화로 들어가서 괴강槐江(충남 달천)의 근원이 되며, 동쪽 모서리로 넘쳐흐르는 것은 용유로 들어가서 낙강(낙동강)의 근원이 되며, 서쪽 모서리로 넘쳐서 흐르는 것은 석문동石門洞으로 들어가서 금강의 기원이 된다. (중략) 사방으로 아무 장애가 없어 전국을 다 둘러 바라볼 수 있었다. 천 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한껏 다 바라보아서 속세의 티끌과 먼지들이 가득했던 가슴을 씻어내었으니, 이것이 이번에 내가 대에 올라온 목적이다.’ - <산문기행> 인용

 

문장대까지 오르는 가파른 깔딱고개에서 아마 이동항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갓과 옷을 벗었다. 문장대를 올라서면 산 능선이 물결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그래서 문장대를 옛날에는 운장대雲藏臺라고 불렀다. 구름 속에 숨은 넓은 바위란 뜻이다.

그런데 세조가 복천암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한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다. 정상 운장대에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 한 권이 있어, 그 뒤부터 문장대라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이동항은 상대까지 올랐다가 중대로 내렸다가 하면서 속리산의 절경을 감상한다. 그는 연신 감탄한다. “! 대단한 것을 보았다. 장엄하기도 하구나!” 동행한 그의 벗 노광복이 붓에 먹물을 찍어 제명할 것을 청한다. 이에 이동항은 거절하면서 옛날 충암 선생과 대곡 선생도 문장대를 지팡이와 신발로 유람했지만 결코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며,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름이 정말 큰 이름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호 지암거사遲庵居士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다.

정상에서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자 마침내 대를 내려와 다시 중사암으로 간다. 여기서 코스가 달라진다. 이동항은 중사암에서 줄곧 계곡 따라 내려오다 석문 두 개를 지나 법주사로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은 중사암 들어가는 길 자체가 비법정탐방로일 뿐만 아니라 중사암에서 능선 너머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묵어 있다.

안내한 공단 직원 이씨는 길이 아예 없어졌다고 말한다. 묵은 길이라도 있으면 풀을 헤쳐서라도 갈 수 있지만 요즘은 나무와 풀들이 원체 웃자라 없는 산길을 헤쳐 나가기란 예사 일이 아니다. 밑에서 거꾸로 찾아가보기로 한다.

법주사에서 외석문까지는 차 한 대 지날 만한 임도가 있다. 외석문까지 차로 올라갔다. 정말 바위가 절묘하게 문을 만들었다. 자연이 만든 석문이다. 이런 석문이 지천으로 널린 속리산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 8개만 꼽아 8석문이라 했다니. 새삼스레 속리산 지명과 관련한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신라 최치원의 시라 하기도 하고, 조선 방랑시인 백호 임제의 시라는 설도 있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는데,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석문 사이로 들어가면 정말 신선이 되기 위해 입문하는 느낌이 든다. 그게 바로 속리산이지 않을까 싶다.

글 월간산 박정원 편집장

~~~~~~~~~~~~~~~~~~~~~~~~~~~~~~~~~~~~~~~~~~~~~~~~~~~~~~~~~~~~~~~~~~~~~~~~~~~~~~~~~~~~~~~~~~~~

청주 09:00

오늘은 코로나 이후 산행을 접고 있던 산악회 길에서 창립기념이라해서 속리산 세조길을 간다고 한다. 처음엔 대청댐 둘레길을 잡았다가 식당과 협의가 잘 안되어 갑자기 산행지를 변경했다고 한다. 어쨌든간 속리산 세조길을 가기위해선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야 한다. 입장료 4000원이다. 적지 않은 돈이다. 여기 산악회 자체가 나이 많으신 분 위주라 입장료 낼 분이야 몇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난 이곳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산대장이란 명목이 있어 아침에 준비하고 나선다. 몇 명이서 택시를 타고 체육관에 도착하니 08 55분이다. 잠시후 버스가 09시 출발을 한다.

 

보은 사내리 레이크힐스 관광호텔옆(해발 약320m) 10:25

버스는 사창사거리를 지나 남부터미널 부근과 용암동등 몇 군데를 정차한 후 달려 미원을 지나고 4차선으로 완전 개통한 보은으로 가는 길을 따라 보은에 닿은 후 좌측으로 진행하여 말티재와 중판리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좌측 길을 따라 가면 속리터널을 지나고 잠시 후 중판리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잠시 가면 사내리와 말티재로 갈리는 삼거리다. 여기서 사내리 방향인 좌측으로 가면 정이품송을 지나고 사내리를 지나서 소형주차장 옆쪽에 있는 레이크힐스 관광호텔 옆에 닿는다.

 

큰바위(0.543km, 430m) 10:43

사내리 호텔 앞에 도착하여 회원들은 세조길로 향하고, 나 홀로 수정봉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얼마안가 수정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호텔 우측편에서 커다란 물통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난 첫머리부터 오르기 위해 소형주차장 뒤편쪽으로 돌아가 산행을 시작하니 산길은 그런대로 괜찮다. 고도가 그리 높지를 않아 크게 어려움은 없다.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진행하니 커다란 물통이 나온다. 호텔 우측편에서 올라온 길이 보인다. 물통을 좌측으로 돌아서 진행을 하면 작은 소나무길을 따라 진행하여 6분 정도를 가니 앞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나온다. 암봉에 사각형으로 된바위가 올려져 있고, 그 옆쪽으로 물고기처럼 생긴바위도 있다. 건너편으로 층층이 쌓여진 바위지대가 보인다. 이곳에서 수정초등학교 부근이 발아래로 보인다.

 

수정봉(정자터, 우측으로, 1.61km, 568.5m) 11:17

큰바위가 있는 바위지대에서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산길은 점차 올라서서 좌측으로 진행하여 큰바위에서 보던 층층바위 위에 닿는다. 이곳에 올라서니 큰바위에서 보는 모습보다 못하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앞쪽으로 커다란 암봉이 보이며 산길은 좌측으로 진행이 된다. 좌측으로 진행을 하다가 우측으로 직등하여 암봉에 올라선다. 비가 온 끝이라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 앞쪽으로 수정봉이 가까이 보이고, 법주사가 내려다보이며 뒤편으로 속리산 주봉인 천황봉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주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암봉에서 내려서서 좌측 사면 길을 따라 진행을 하면 잠시 진행하여 슬랩바위가 나온다. 이곳으로 오르며 좌측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정이품송정도는 되는 듯하다. 멋지게 생긴 소나무다. 슬랩지대를 오르면 암릉지대가 이어지며 수백년생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암릉 끝으로 내려서서 진행을 하면 산길은 좌측 사면으로 나 있다. 한동안 좌측 사면 길을 따르다가 적당한 곳에서 능선으로 오르니 길이 있다. 바위를 따라 능선으로 왔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진행을 하니 어느덧 수정봉 정상이다. 정자를 지르려 했는지 받침돌을 육각으로 세우고, 주변으로 썩은 목재가 쌓여 있다. 조망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수정봉(정자터, 우측으로, 1.61km, 568.5m) 11:17

수정봉 정상에서 능선은 우측으로 급격히 꺽여서 서서히 내려선다. 잠시 내려서면 바위아래 줄이 매여진 곳에 닿는다. 줄이 아니면 미끄러워서 건너기 힘들겠다. 줄을 잡고 건너서면 우측으로 내려선 길이 보인다. 산경표에 표시된 봉까지 다녀온 후 이곳으로 내려서기로 마음 먹고 잠시 가면 커다란 바위에 한문으로 많은 글이 적혀 있는 곳에 닿는다. 굵직한 소나무 기둥에 수정봉이라 표지판도 붙여 놓았다. 이 소나무 뒤편 바위면에 수정봉(水晶奉)이라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으로 올라서니 조릿대길이 우측으로 잘 나 있다. 이 길은 다시 돌아와서 다녀오기로 하고 좌측으로 진행을 한다. 바위 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서면 10여분후 우측 법주사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첫머리에 로프가 매여져 있다. 이지점을 지나고 슬랩바위지대를 지나서 가면 안부고개에 닿는다. 좌측으로는 여적암 방향인 만판동으로, 우측으로는 법주사로 향하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잠시 오르면 산경표에서 가리키는 수정봉이다. 해발 약485m로 삼각점이 있다고 하는 대 삼각점은 찾지 못했다. 이봉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법주사다.

 

되돌아서 수정봉 글씨 있는 봉(수정대, 2.75km) 11:48 ~11:53

산경표에서 표시하는 수정봉에서 되돌아선다. 잠시 후 안부고개에 닿고 올라서는 대 앞쪽에 스님 한분이 올라가신다. 잠시후 슬랩바위지대에서 스님은 우측 슬랩바위지대 위쪽으로 오르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서 좌측으로 법주사로 내려서는 길을 지나 수정봉 글씨가 있는 봉에 닿으니 485봉에서 12분가량이 지났다. 이봉에서 조릿대 길을 따라 직진으로 가면 널찍한 바위가 나오고 앞쪽으로 더 널찍한 바위가 보인다. 직접 내려설 수는 없다. 조금 돌아서 내려서면 거북바위를 지나 널찍한 수정대에 닿는다. 이곳에서 보는 법주사의 모습과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속리산의 주능선이 아름답다. 법주사방향으로 수직바위에 고사목 한그루가 멋지게 누워 있으며 안전을 위하여 안전로프가 쳐져 있다. 이곳에는 오래전 전설에 나오는

거북바위가 있으며 거북바위 위에 세웠던 석탑의 일부가 너럭바위에 몇 조각이 남아 있다.

 

수정봉과 거북바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 법주사 서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산을 수정봉이라 한다.

수정봉이라 하는 이유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남산(南山)이 있는데 남쪽은 화기(火氣)가 있는 곳으로 법주사는 모든 건물이 목조로 되어 있어 남산의 화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 이를 우려하여 법주사 뒷산을 수성(水性)을 가진 수정으로 산 이름을 지어 남산의 화기를 눌러 법주사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정봉이라 하였다.

이 수정봉 정상에 넓고 편편한 큰 바위가 상하 두 계단으로 깔려서 백여명이 앉아 즐길만한 곳으로서 한눈에 법주사 경내 일원이 똑똑히 보이는 명당이다. 반석 위쪽에는 거북모습을 갖춘 자연석이 있는데 이 거북머리가 중국쪽을 향하고 있는 전설은 이러하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 거북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기를 동국(한국)명산에 큰 거북의 모습을 한 이물로 인하여 중원(中原:중국)의 재화(財貨)가 동국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 돌을 발견하고 돌 거북의 목을 자르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 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그리하여 목이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 거북이 되고 말았다.

목 잘린 거북은 서기1665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閔辰益)이 속리산 수정봉에 올라 탑을 보고 또 여기에 사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탑을 헐어 버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거북등에는 탑을 세웠던 흔적이 있고 법주사 방향으로 수정봉 중턱에는 파손된 탑신들이 남아있다.

 제공자 또는 참고문헌 : 보은군지 (전설)

 

식당(큰집식당, 5.11km) 12:30 ~13:39

수정대에서 돌아나와 수정봉 글씨가 있는 앞쪽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금시 길이 없어진다. 뚜껑을 덮은 샘터가 있으나 어디서 접근을 했는지 모르겠다. 잠시 내려서다 좌측 계곡을 넘어 수정대 아래쪽 능선에 붙어서 진행을 하여 이리저리 빠져나와 내려서면 법주사로 가는 일주문 옆 다리가 있는 곳에 닿는다. 수정대에서 대략 25분이 소요되었다. 이쯤에서 세조길을 다녀서 내려오는 회원님과 만나고 매표소를 지나 사내리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니 12 30분이다.

 

참고로 법주사의 문화재를 소개한다.

법주사는 553년에 절이 세워졌다. 무려 1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찰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팔상전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거대한 노란색 불상이 보인다. 금동미륵대불이다. 1990 4월 붕괴직전의 세멘트미륵부처님을 해체하고 청동미륵대불로 다시 조성하였다. 이후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금으로 개금을 했는지의 진위여부가 확실치를 않다. 그때 쓰여질 황금 80kg이 감쪽 같이 없어지고 가짜 황금으로 입혔다는 논란이 있었는대 정확한 진위여부는 모른다.

법주사에는 문화재가 여럿있다.

국보 55호인 팔상전 목조탑이다.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담은 그림인 팔상도가 있다.

팔상전 뒤편으로 커다란 쌍사자석등(국보 제5)이 있으며, 대웅보전(보물 제915)이 나온다. 대웅보전 앞에는 사천왕석등(보물 제15)이 자리잡고 있다. 사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있는 석등이다.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커다란 돌로 만든 감로수가 있다. 무쇠로 만든 철솥(보물 제1413)이라고 한다. 3000명의 인원이 먹을 밥을 지었을 것이라고 한다. 금강문 앞에는 커다란 당간지주가 있다. 녹이 슬었는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철봉이 하늘 높이 서있다. 지금이야 사용하지 않지만 당간지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석련지(국보 제64)가 있다. 문양과 조형형태가 아름다운 석조조형물이다.

돌아서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마애석불이 있다.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이었다. 미륵불이라고 하는데 드물게도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거의 마모되지 않고 형태와 문양이 뚜렷하고 선명하다.

 

정이품송앞 연꽃단지 13:45 ~14:01

사내리 식당에서 5분여 가면 정이품송이 나오고 그 앞쪽으로 연꽃 단지를 만들어 놨다. 연꽃이 소담스럽지는 않고 가운데는 연꽃이 이미 피었다지고 커피집 있는 쪽만 조금 남아 있어 몇 해 전 갔을 때만 못하다.

 

말티재 14:08 ~14:45

연꽃단지에서 이제 말티재로 향한다. 10분을 이동하면 말티재에 도착을 한다. 몇 해 전 한남금북정맥 2차를 할 때 공사를 했었는 대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생태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커피숍이 자리하고 보은방면으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말티재의 구불구불 오르는 길을 조망 할 수 있다. 좌측 편으로 보이는 임도 길은 말티재휴양림으로 가는 장재간선임도다. 생태통로 커피숍 앞에서 남쪽방향으로 속리산으로 향하는 정맥 길은 길이 확실하게 보이지만 북쪽으로 가는 상당산성 방향으로 오르는 첫머리가 보이질 않는다. 말티재에는 소형차 주차장, 화장실등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어 잠시 가는 길에 들러보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

속리산 수정봉 엄청 오래전에 가본 후 처음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수학여행을 가면서 올라가본 것 같다. 그때는 법주사에서 금시 올랐던 기억이 난다. 내려올적 이 길을 찾으려 해보았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잡아 실패 했지만 수정대의 널찍한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법주사와 속리산 주능선의 모습은 장관이 었다. 이후 정이품송,연꽃단지를 들러 마지막으로 말티재를 관광한 후 오던 길을 따라 청주로 진입하여 이쪽 방향에서 가신 분들은 대부분 사창사거리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